경기도 남양주 사릉은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다. 멀리서 보면 소나무 동산 가운데 능이 자리한 모습이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홍살문과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이 바라보이는 그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닮았다.

동이 트기 전 안개에 싸인 소나무 숲은 많은 전문 사진작자들을 불러낸다. 소나무 숲은 야생화 천국이다. 능으로 향하는 길은 철따라 들꽃 세상이다. 가는 길목 얼굴을 내미는 들꽃들도 나름의 사연을 지닌 듯해서 더 찬찬히 발을 옮기며 마음을 진정하게 된다.

남양주에는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그리고 광해군묘(光海君墓)가 있다. 사릉은 조선 단종(端宗)의 비 정순 왕후(定順 王后:1440~1521) 송씨의 능이다. 능 입구에 들어서면 홍살문, 정자각, 능침까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사릉은 작지만 아담한 능이다.

정순 왕후는 여산송(廬山宋)씨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이다. 14세에 왕비로 간택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순 왕후는 단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궁궐에 들어왔다.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숙부 수양대군은 어수선한 정국이나, 선왕 문종의 상중(喪中)에도 혼인잔치를 치르기를 위협하였고 끝내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강요하여, 혼인을 거절하고 있던 단종을 굴복시켜 결혼하게 되었다.

가례를 치른 이듬해 수양대군은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종친들과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 앉아 수강궁에 살게 되었다. 1457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음모가 발각되면서 집현전 학사들은 사형을 당하였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귀양길에 올랐다. 정순 왕후도 노산군 부인으로 강봉되어 단종과 이별하게 된다.

단종의 춘추 17세, 정순왕후는 18세였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곳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을 잇는 청계천 다리인 영도교(永渡橋)다. 두분의 마지막 만남을 지켜본 백성들이 훗날 ‘영 이별다리’ 또는 ‘영영 건넌다리’라고 불렀다. 지금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공사 때 현대식으로 다사 건설한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왕으로 단종(1441-1457)을 꼽는다. 그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단종비 정순 왕후 송씨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64년이란 긴 세월을 더 살았다.

정순 왕후의 처절한 삶의 흔적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 창신동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첫째 슬픈 역사의 흔적 1호는 영도교일 게다. 단종의 영월 귀양길에 이 다리까지 따라왔지만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였다. 대궐에서 쫓겨난 열여덟 살의 정순 왕후는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 작은 산기슭에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 붙인 초막을 짓고 살았다. 현재 숭인동 청룡사 옆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적힌 비석이 남아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어서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이 비참한 소문을 들은 세조가 집과 식량 제공을 제안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훗날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래서 그 동네를 ‘자줏골’이라고도 한다.

유배 당한 단종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후는 아침 저녁으로 소복을 입고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 멀리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 이 언덕을 ‘동망봉(東望峰)이라 부른다. 청룡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여인의 한 맺힌 울음은 도성 주변을 뒤덮었다. 마을 여인네들도 왕후와 같은 심정으로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슬픔보다 지독하고 가련했던 현실과 왕후의 고귀한 생애는 조석걱정의 처지가 한을 더했다. 왕후와 시녀들이 옷감에 물들이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동망산 계곡 곳곳에는 자줏빛 띠풀이 많았다. 옷감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빨아 물들인 뒤 그곳 바위들에 널어 말렸다. 청룡사 북쪽 기슭 300m거리 원각사 옆 화강암 바위 밑에는 지금도 샘물이 솟는 우물이 남아 있으니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영도교 부근 금남(禁男)의 채소시장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이 시장은 일부러 주변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려는 속임수였다 한다. 정순 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마다 채소를 가져다  주었는데 왕궁에서 이를 말리자 왕후의 거처 가까운 곳에 시장을 열고 혼잡한 틈을 타 몰래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었다 한다.

이 여인시장은 채소를 파는 척 모여든 뒤 왕후에게 채소를 공급한 것이다.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등학교 앞에 ‘여인시장터’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2014년 4월 22일 오후 3시 숭인 근린공원에서는 간결한 제7회 단종비 정순 왕후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궁궐 쫓겨난 뒤 64년 비극적인 서러운 삶을 살았지만 정순 왕후는 82세까지 장수하였고 1521년 별세했다. 정순 왕후의 사후에도 자식이 없어서 제대로 장사와 제사를 지내줄 사람도 없었으니 고달픈 역경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단종의 누님 정혜 공주의 시집 해주정씨 집안에서 시신을 거두어 문중 선산에 안장하였다. 그곳이 현재의 사릉(思陵)자리다.

훗날 조선 중종은 정순 왕후를 대군부인으로 복위시켜 주었고, 이어 숙종년간에 노산군이 단종 대왕으로 복위되면서 사릉도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다. 복위되었을 때 대군부인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아담하고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도 작고, 병풍석, 난간석, 무인석은 없으며, 문석인과 마석, 양석과 호석, 만주석이 한 쌍씩 있을 뿐이다. 정자각과 비각은 갖추고 있지만 능 전체는 초라하고 쓸쓸해 보인다.
본래 왕릉이 조성되면 그 주변 10리 안에 있는 민간인 묘는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지만 사릉에는 능침 양 옆, 또 위쪽에 민간인들의 묘들이 있다. 이 묘들은 모두 해주 정씨 집안사람들의 묘다.

조선 숙종 24년, 정순 왕후가 단종과 함께 복위되자 사릉 총리사 최석정은 숙종에게 ‘사릉은 본래 문종의 외손자이며 정혜 공주의 아들인 정미수 개인 땅이고, 왕후께서 살아서 후사를 부탁했으므로, 능으로 봉해졌다 해도 정씨묘를 옮기면 정순왕후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정씨 묘역을 그대로 둘 것을 청원했다. 이에 숙종은 그대로 두라고 허락하여 정순 왕후의 능은 민간의 묘에 둘러싸여 있게 되었다. 사릉(思陵)은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붙여진 애틋한 사연이 담긴 능호(陵戶)다.

단종의 영월 장릉과 정순 왕후의 사릉, 살아서 애틋하게 이별한 어린 부부의 한을 죽어서나마 풀어주도록 두 능을 합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문화재 보존의 차원에서 그 의견은 받아드리지 않았다. 남양주시와 영월군은 단종과 정순 왕후의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자매결연을 하고, 사릉과 광릉의 소나무를 교차 식수했다.

사릉에는 소나무들이 유난히 많다. 백송, 미선나무 등 천연기념물, 희귀식물, 전통수종의 식물이 많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궁과 능, 원의 고건축 복원목재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세워졌다.
숭인동 골목길 관광코스를 이용하면 왕후의 생애를 되짚어 볼 수 있다. 그 코스는 영도교→여인시장터→동묘→풍물거리시장→낙산묘각사→동망정→정업원허 및 청룡사→자주동상 및 비우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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