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급작스럽게 타계한 故 최수부 회장의 비보로 제약업계에 충격의 여운이 아직까지도 가시질 않고 있다. 한국이 낳은 자수성가의 국제적 본보기이자 한방 세계화의 선구자로 불렸던 최수부 회장의 타계는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에 의계신문은 총 5회에 걸쳐 지난 40년간 한방의 대중화와 과학화를 위해 뚝심 경영으로 광동제약을 이끌어 왔던 최수부 회장의 일대기를 짚어본다.
(자료: 저서 '한국을 빛내는 CEO')

소문난 어린 장사꾼의 탄생

▲ 당시 16세였던 최수부 회장의 가족사진.

故 최수부 회장은 1936년 1월 10일 일본 규슈 후쿠오카 야나기가와에서 부친 최발봉씨와 모친 변생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덕분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으나 초등학교 시절 동료 일본학생들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귀국한 그는 그 다음해 인 1946년 봄, 화원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힘겨웠던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나가던 그는 아버지의 사업이 1년 만에 파산하게 되면서, 어린나이에는 쉽게 겪을 수 없는 고난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고난은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11살 때부터 몰아닥친 시련으로 인해 일찍부터 성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장사수완을 익힐 수 있었다. 이미 소문난 어린 장사꾼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겪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그가 성장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좀처럼 좌절하는 법이 없고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결과에 어떻든 간에 끝장을 보고 마는 최 회장의 성격은 이미 그 시절부터 다듬어 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군납업자의 조수로 일했던 그는 22세가 될 때까지 군납업을 계속했으며, 1957년 12월 10일 군에 입대해 오산 곡사포부대에서 복무하다가 1960년 6월 30일 2년 6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만기 제대했다.

▲ 최수부 회장의 군 시절 사진.

제약인생, 그 운명적인 시작

최수부 회장은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 왔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황은 4‧19 혁명 이후 혼란 그 자체였으며,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기업도 소수였다.

▲ 최수부 회장과 박일희 여사의 결혼 10주년 기념사진.

어지러운 전시상황 속에서 본격적인 취업을 시작한 그는 우연히 ‘경옥고’라는 한방약을 파는 외판원 모집 광고를 보게 된다. 면접은 보았으나 합격 통보를 받지 못한 그는 달걀 두 꾸러미를 사들고 장충동의 지사장 집으로 아침 일찍 찾아 갔다.
“지사장님, 저 영업사원 꼭 해보고 싶습니다. 잘 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의 눈에서 뚝심과 패기를 읽었을까. 지사장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중구 을지로 2가에 소재한 경옥고 제조 판매업체인 고려인삼산업자 외판사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제약 인생길로 들어선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웬만한 회사원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2만 환짜리 경옥고를 판매하는 일이 그의 업무 였으나, 포기를 모르는 끈질김으로 항상 돋보이는 판매원은 그였다. 당시 그의 월급은 15만 환, 요즘 월급으로 따져보면 월 천 만원의 고소득자였던 셈이다.
그는 26세 겨울, 경북 고령 출신 박일희씨와 결혼했으며, 결혼식 전날까지 약을 판매했다는 일화 또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대변케 했다.

▲ 최수부 회장이 작년 창립기념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최수부 시대’의 개막

이 모든 대가는 오직 그가 열심히 뛰어다는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한번 안 사겠다고 거절해도 최소한 10번 이상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갔다. 또 그는 배짱이 두둑한 외판원이기도 했다. 어떤 외판원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재무부 이재국장실까지 찾아 갔던 것이다. 처음에 내치던 국장도 그의 성실함과 끈질긴 인내심, 인간미를 높이 평가해 주위의 지인들을 연결시켜 주었고, 이로 인해 그는 많은 고객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끈기와 배짱으로 엄청난 물량을 팔 수 있었지만, 판매왕 최수부가 최고의 판매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성실한 고객관리였다. 그는 경옥고를 판 후에도 정기적으로 고객을 찾아가 고객들에게 만족감과 신뢰도를 쌓아 갔다.
또한 그에게는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있었다. 바로 3년 안에 300만원의 자금을 마련해서 자신의 기업을 창업하겠다는 것이다. 가난과 맞설 무기라고는 오직 패기와 끈질긴 노력뿐이었던 청년 최수부. 그는 3년 만에 고려인삼산업사를 의원사직하고 1963년 10월 16일, 서울시 용산구 동빙고동에서 광동제약사를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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