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열린‘국제인간유전자편집회의’장면. 이 회의를 통해 유전자 가위를 인간 배아에 도입하여 유전자가교정된 아이를 출산하게 하는 행위는 그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당분간 금지돼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이 발표됐다.
2015년 12월 열린‘국제인간유전자편집회의’장면. 이 회의를 통해 유전자 가위를 인간 배아에 도입하여 유전자가교정된 아이를 출산하게 하는 행위는 그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당분간 금지돼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이 발표됐다.

영국 연구팀은 암컷 모기의 불임 유전자를 퍼뜨리는 크리스퍼 유전자 드라이브를 만들어 실험한 데이터를 201611일자 <Nature Biotechnology>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제목은 말라리아 벡터 감비아학질모기에서 암컷 생식을 표적으로 하는 크리스퍼-캐스9 유전자 드라이브 시스템(A CRISPR-Cas9 gene drive system targeting female reproduction in the malaria mosquito vector Anopheles gambiae)’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전자 드라이브인데, 이 기술은 어떤 종 전체에 특정 유전자를 확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실험에 사용된 불임 유전자는 실험 모기 집단 내에 빠르게 전파됐고, 어느 순간 모기 집단 전체가 붕괴됐다. 만약 이런 실험이 야생의 모기집단에서 이루어진다면 지구상에 모기라는 종 전체가 사라지는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는 자신의 책 <크리스퍼가 온다>에서 이 실험에 주목하면서 크리스퍼 기술이 해악을 끼칠 유전자 드라이브를 사용하는데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리고 지구에서 1억년 이상 살아온 날개 달린 해충을 갑자기 제거하는 일은 축복이 될 것인가, 저주가 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크리스퍼 아기를 안겨주고 싶다고?

<크리스퍼가 온다>라는 책은 너무나 다재다능해서 더 치명적일 수 있는 크리스퍼 기술을 어떻게 하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다우드나 교수는 책에서 2014년 봄에 겪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공개했다. 크리스퍼 기술이 널리 알려지면서 책의 공동저자인 샘 스턴버그가 어느 기업가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업가는 사업 아이디어로 행운의 부모에게 세계 최초로 건강한 크리스퍼 아기를 안겨주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중국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서 게놈을 교정한 영장류 원숭이를 처음으로 탄생시켰다. 다우드나 교수는 이제 크리스퍼로 게놈을 조작한 생물 목록에 사람이 올라가는 일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인간 배아에 크리스퍼를 사용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 우려는 곧 현실화됐다. 이듬해인 20154월 중국 광저우 중산대학교 연구팀이 <Protein and Cell>에 인간 배아 86개에 크리스퍼를 주입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한 생식세포 편집 연구가 세상에 나오면서 우려했던 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크리스퍼 기술의 개발자로서 다우드나 교수는 크리스퍼를 악용하는 과학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생학을 추종했던 히틀러 같은 독재자 혹은 자녀의 지능이나 외모의 개선을 원하는 이기적인 부모에 의해 크리스퍼가 남용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크리스퍼 인간배아 연구 잠정 중단하자

마침내 다우드나 교수는 2015124일 스탠퍼드대학교 명예교수인 폴 버그를 포함한 20여명의 관계자를 캘리포니아 나파밸리로 초청, 하루 일정으로 포럼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 세계가 동참한 가운데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영향력을 적절하고 충분히 논의할 때까지 과학계가 생식세포 편집 연구를 중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토론의 핵심은 2015319<사이언스> 온라인 판에 유전공학과 생식세포 유전자 변형을 향한 신중한 방향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발표됐다. 사설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크리스퍼 기술의 사용에 관한 공개적인 토론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우드나 교수의 주도로 그 해 121-3일 미국 국립과학원, 중국 과학학술원, 영국 왕립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국제인간유전자편집회의(International Summit on Human Gene Editing)’가 워싱턴DC에서 조직됐다. 이 회의를 통해 유전자 가위를 인간 배아에 도입하여 유전자가 교정된 아이를 출산하게 하는 행위는 그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당분간 금지돼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이 발표됐다.

이런 과정을 이끌면서 다우드나 교수는 특정 개인의 손상된 건강을 크리스퍼로 고치는 일을 금지시키는 길과 크리스퍼를 남용하고 사회 가치를 뒤엎는 길 사이로 난 좁을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신기술을 명백히 선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초의 유전자 편집 아기 탄생 파문

그러나 2015년 국제인간유전자편집회의의 권고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201811월 중국의 한 연구팀이 유전자를 편집한 수정란을 착상시켜 쌍둥이 아기를 출산시켰다고 발표했다. 크리스퍼 기술로 HIV 감염 내성을 지닌 쌍둥이 여아가 탄생한 것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유전자 편집 아기 탄생을 규탄하는 성명서가 잇따르면서 국제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중국 정부는 연구자를 해임하고 처벌 검토에 나서는 한편, 크리스퍼 개발자인 에마뉴엘 샤르팡티에를 비롯한 세계 7개국 저명한 과학자와 윤리학자 18명은 2019314<네이처>국제 공동의 규범이 정립되고 안전성이 입증되기 전까지 유전자 편집 인간 배아의 착상을 전면 중단하고 인간 유전자 편집을 관리 감독할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에 따라 세계보건기구(WHO)2019319일 유전공학, 의학, 윤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인간 유전자 편집 국제표준 개발 및 감독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발족했다. 자문위원회는 인간 생식세포 게놈 편집의 임상적 적용을 진행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못 박고 모든 국가의 규제 당국은 이 분야에 대해 더 이상의 연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중간 권고안을 채택했다.

자문위원회는 2021년까지 2년 동안 국제표준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한 세계적 공론화를 이끌기로 했다. 환자, 시민사회, 윤리학자, 사회과학자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와 협의하고, 지역에서 국가로, 다시 세계로 확장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선하거나 악한 기술은 없다

이미 자신의 책에서 다우드나 교수는 선천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기술은 없다. 다만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는 딱 한 분야만 제외하면 나는 사실상 크리스퍼가 이루는 거의 모든 경이로운 진전에 흥분하고 열광한다. 나는 최소한 인간 생식세포의 유전자 편집이 일으킬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기 전까지는 우리 후손의 게놈을 영구히 변형하는 데 크리스퍼 기술을 사용하는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섣부른 상태에서 크리스퍼가 남용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크리스퍼는 인류에게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수정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수정된 유전자는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후손으로 대물림될 것이다.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크리스퍼의 잠재력에 관한 논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다우드나 교수는 더 늦기 전에 세상과 대중을 끌어들여 자연계에서 유전자 편집이라는 기술을 어떻게 다룰지 포괄적인 논의를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역설했다.

2년 전 WHO의 테드로스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은 유전자 편집 기술은 인류 건강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큰 기대를 받고 있지만, 윤리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면서 인간 유전자 편집을 둘러싼 복합적인 문제에 대한 일관된 권고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약속한 대로 올해에는 그 권고안이 나와 크리스퍼 남용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