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연은 민간인 출입통제선 북방에 위치하여 통제선으로부터 차로 20여분 걸려 갈 수 있다. 휴전 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주변경관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위의 산세가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오염되지 않아 희귀어종인 열목어의 우리나라 최대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두타연에는 높이 10m, 깊이 12m의 폭포가 있으며, ‘폭포주위를 따라 20m 높이의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 하고 동쪽 암벽에는 3평 정도의 굴이 있는데 바닥에는 머리빗과 말(馬) 구박이 반석위에 찍혀있다.

두타연이란 이름은 1천년 전 두타사란 절이 있었다는데서 연유된 이름이며, 민간인출입통제선 이북에 위치하여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두타연 주차장과 두타연 계곡을 내려다보는 백석산 능선상의 장군바위는 투구 쓴 장군의 옆모습 같다. 이 산줄기 넘으면 단장의 능선이 있고 4km 뒤에는 북쪽 땅이다. 두타연 주차장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옛 두타사 절터였다고 하는 곳에 안보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양구관광을 위해 컴퓨터를 켜 두타연을 찾아 네티즌들의 여행이야기를 클릭하면 배경음악으로 ‘비목(한명희 작사·장일남 곡)이 흐른다. 두타연 출발지에서 냇물소리를 들으며 트레킹에 나선지 10분 쯤 지나면 조각공원 가기 전 왼쪽에 양구전투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탑 앞 ‘길 가소서’를 읽고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 ‘조각공원’으로 발을 옮긴다. 6.25전쟁 당시의 무기들과 철조망 국화 한송이, 그리고 두타연의 낭만을 옮겨갈 야외사진틀에 몸을 기대본다.

양구지역 9개의 전투 상황이 재현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고지전투, 피의 능선 전투, 백석산 전투, 도솔산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대우산 전투, 949고지 전투...
 

길 가소서

배고름으로 삼백 예순 날 / 사무친 그리움으로 삼백예순 날 / 님의 그 삼백 예순 날이 /
반 백번 되도록 / 어리석어 몰랐습니다
마디마디 피로 물든 능선 / 토막토막 끊어진 단장(斷腸)의 대지(大地) /백석산 도솔산 가칠봉 펀치볼......
누군가는 치루었어야 할 능욕을 / 님께서 온몸으로 치루신 터 / 이제 그 터위에 님의 소망따라 / 새싹 움트고 여명이 밝아옵니다/
님 이시여! / 지금은 피맺힌 원한도 / 사무친 그리움도 모두 풀 때 / 이승에서 못다 이룬 민족(民族)의 화합(和合) / 이 땅에서 하나 되어 / 밝고 고운 한 빛으로 / 부디 길 가소서
그리하여 새로운 날 / 이 땅에 다시 오시어 / 새 아침의 기를 / 땅 끝까지 누리소서 /
고운 님이시여 길 가소서/

“초연(硝煙)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碑木)이여......” 양구에서 작시된 이 가곡은 지금도 우리 모두가 애창하고 있다.

참혹했던 민족상잔의 시기에 이곳 양구지역은 피, 아간에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격전지가 바로 여기다. ‘51년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호국선열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회담여건 조성과 한 치라도 더 많은 국토회복”을 위해 바로 이 곳에서 불타는 청춘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지 어언 60여년, 그러나 이처럼 고귀한 애국선열을 찾는 이 드물었고 산천은 말이 없었다. 이에 육군 백두산 부대 전 장병은 그간 외롭게 구천(九天)을 떠돌던 호국영령과 무명산화(無名散花)하신 모든 영령들을 한 자리에 모셔 그넋을 가리고자 이 碑를 건립하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의 전투개황을 꼼꼼히 읽어보며 가신님들의 명복을 빌었다.

1. 피의 능선 전투(‘51.8.18~8.22)
 국군 제5사단과 미 제2사단이 주력이 되어 적12사단 1연대와 27사단이 점령한 983교지 일대를 집중공격, 적에게는 천연적인 방어를 제공하여 아군에게는 “눈위의 혹”이라 불렀던 983-938-773일대의 고지군을 점령한 전투. 이 전투로 적은 사상자만도 1,250명에 이르렀고 아군 역시 전사상자를 포함 1,030명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루 평균 3만여발, 최고 5만여발의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적이 설치한 2,000여발의 대인지뢰로 인해 수많은 발목 절단 부상자를 감수해 가며 끝내 고지를 탈취하는 모습을 본 미 성조지 기자는 “Bloody Ridge Line"이라는 제목으로 격전상황을 보도, ”피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1차 : ‘51.9.13~9.26 / 2차 : 10.5~10.13)
30여일간 미 제2사단과 적6사단, 12사단이 총력을 경주한 전투로서 1일 평균 45회의 전폭기 출격과 일 평균 1,000파운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931고지 일대에만 30여만발의 포탄이 집중되었다. 이 전투는 결국 적에게 1,470명의 전사자와 22,600명의 전상자를 안겨다 준 채 미 제2사단의 승리로 끝나 공산측을 휴전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들이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아군 피해도 커 597명이 전사하고 3,000여명이 부상당하였는데 이를 취재했던 미 종군기자가 “Heart Break Ridge"로 표현한데서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이라 명명되었다.

3. 백석산 지구 전투(1차 : ‘51.9.24~9.27 / 2차 : 9.30~10.1)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출이 부진했던 시기에 국군 제7사단이 적 제 32사단, 12사단과 접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적 사살 856명, 포로 760명의 전과를 올린데 비해 아군의 피해는 적어 전사 95명, 부상 290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로 인해 중동부 전선이 4km 이상 북상되었고 인접부대의 진출을 엄호하면서도 서쪽고지군 일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조성하였다.

4. 도솔산 지구 전투(‘51.6.4~6.19)
최초 미 해병 제1사단이 공격을 담당하였으나 상당한 손실만을 입은채 물러나고, 뒤 이어 한국군 해병 제 1연대가 최초로 산악전투에 투입됨으로써 적 12사단을 격멸하고 쾌승을 거둔 전투. 해병 제1연대는 이 16일간의 전투에서 24개의 고지들을 탈취하고 칠흙같은 밤과 안개속에서도 귀신같이 적을 찾아내어 궤멸시킴으로서 최초로 “무 적 해 병”이란 칭호를 얻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해병대의 신화를 창조한 이 전투에서 3,263명의 적을 사살하고, 아군은 115명의 전사자와 603명의 부상자만을 냈던 전투였다.

5. 가칠봉 지구 전투(1차 : ‘51.9.4~10.14 / 2차 : 10.27~10.31)
국군 제5사단이 2차에 걸쳐 적 2사단과 7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사살 2,604명과 포로 270여명등 전과를 거두고 가칠봉을 확보한 전투였다. 특히 김일성이 전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 고지와 스탈린 고지를 수차례 걸쳐 목전에서 공격. 종전후 155마일 휴전선 중 가장 높은 곳에서 적을 발아래 관측할 수 있는 고지인 가칠봉(1,242m)을 수중에 넣었다. 이 전투로 아군은 전사 824명, 부상 4,200여명의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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