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둘레길 개화산 제1코스를 찾아 떠나려면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 2번 출구로 나간다. 개화산, 치현산, 서남한강공원, 강서한강공원이 목표다. 강서둘레길은 11.44㎞, 그 제1코스는 3.35㎞, 제2코스는 3.53㎞ 그리고 제 3코스는 4.56㎞다. 

강서둘레길을 둘러본다면 강서구에 있는 겸재정선 기념관을 빼놓지 말라고 권고를 받게 된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 시대를 연 겸재 정선(1676~1759)은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일생을 마쳤다. 그는 말년에 5년간 양천현령(1740~1745)을 지냈다. 조선 후기 양천현은 지금의 강서구다. 그래서 강서구에 겸재 정선기념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타고난 화가 겸재는 현령으로 근무하면서 강서와 한강변의 경치를 작품으로 남겼다.

‘양천활경첩’(8점), ‘경교명승첩’(32점)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중에서 강서지역을 그렸거나, 강서에서 바라본 강 건너의 풍광 그림은 영인본이나 복사본이 만들어졌다. ‘신묘년 풍악도첩’과 북악산, 인왕산 일대의 경치 좋은 여덟 곳을 그린 ‘장동팔경첩’은 빛나는 작품이다. 겸재 정선기념관은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이나 2번 출구로 나오면 찾을 수 있다. 강서둘레길 따라 걷다보면 ‘겸재정선이 바라본 한강의 아름다운 풍경’이란 현판을 만난다. 

 지금의 서울의 옛모습이 개발과 파괴로 거의 사라졌으나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0)이 남긴 그림을 통해 300년 전 아름다운 서울의 옛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은 65세였던 1740년 초가을부터 70세까지 만 5년 간 양천(강서구 가양동 일대)의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강서지역을 중심으로 한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소악후월(小岳候月)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소악루는 이유(1674~1753)가 1737년경 창건한 누각으로 현재 가양동 궁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왼쪽 하단에 소악루가 있고 그 너머로 이유의 본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있다. 화면 우측 변에는 탑신, 누미탑, 선유봉을 차례로 배치시켰고, 원경에는 목멱산을 위시한 금성산, 와우산이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아래 육중한 바위 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금성평사(錦城平沙)’, 금성의 평평한 모래펄을 양천쪽에서 바라본 지금의 난지도 부분의 승경을 근처의 금성산에서 이름을 따와 화재를 짓고 화폭에 담은 것이다. 원래 난지도는 모래내의 홍재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라서 한강 쪽이 호수처럼 넓어져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목멱조돈(木覓朝暾)’

‘목멱산에 아침해가 떠오르다’. 목면산(남산)에 아침해가 떠오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양천현아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목멱산은 강 건너 동쪽에 위치하게 된다.

 ‘개화사(開化寺)’

개화사는 개화산에 있는 사찰로, 현재의 약사사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행주산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호해 풍광을 조망할 수 있으며,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 북악산, 남산,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한강 상류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이다. 정선의 개화사 그림은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에 전해진다.

 ‘낙건정(樂健亭)’

정선이 살던 시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김동필(金東弼?1678~1737)의 별서인 낙천정을 그린 것이다. 강변에 절벽을 이루는 덕양산 줄기 끝자락 상봉 가까이에 큰 기와집 두 채가 있는데 이것이 낙천정의 살림집과 정자로 보인다. 김동필(1678~1737) 별서인 낙건정 송인명, 장일헌의 별서도 보인다.

 ‘행호관어(杏湖觀漁)’

‘행호에서 고기잡이를 보다’. 행호는 현재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덕양산 부근의 한강으로 호수처럼 넓다고 해서 (杏湖)라고 불렀다.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豊山沈氏文靖公派墓域)은 개화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개화산으로 진입하는 느티공원 입구 좌측에는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측에 느티나무 2주와 함께 은행나무가 서있다. 나무주위는 철책으로 둘러져 있다. 방화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조선 중종때 정승 심정이 심은 나무로 능말 옛터를 지키던 거목이다.

방화동 40-1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높이 26m, 수령 400m)와 느티나무(높이 26m, 수령 450년)는 마을 역사를 지켜보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오고 있는 신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무들은 김포공항 북쪽으로 1㎞ 떨어진 개화산 아래 품 안의 자리에 있으며, 옆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는 양지바른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정곡리, 긴동리와 더불어 방화동을 이루었던 능말 옛터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 때부터 약 450년 된 자연부락으로서 지금의 김포 장릉(원종 왕릉)이 터를 잡으려했다가 약간 협소하여 자리를 바꾼 것에서 능말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여름 한철 주민들의 화합장소와 쉼터로 사랑을 받았을 만한 이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둘레가 각각 5.6m, 3.8m 되는 흑갈색의 아름드리나무다.

나무가 있는 곳에는 사방을 둘러 자갈을 깔고 보호경계를 표시하였고, 그 안에는 지역 토착주민 20명으로 구성된 능우회 회원들이 지난 1992년 10월 17일에 세운 능말 옛터 애향비가 있다. 느티나무 오른쪽에 조그만 길이 있으며, 이 곳으로 들어가면 개화산 등산로 초입이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약수터가 있으며, 묘역은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풍산 심씨 묘역(豊山沈氏 墓域)내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14714∼1531)의 묘와 그의 아들인 심사손, 심사순, 손자 심수경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 기가 함께 마련되어 있으며, 묘역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심정의 묘 1기, 심사순의 묘 1기, 심사손과 부인의 묘 2기, 심수경과 부인의 묘 2기와 묘비 5기, 상석 4기, 문무인석 4기, 신도비 1기 등이다.

 개화산 동쪽으로 이어진 높이 70.5m의 작은 고개는 강서구 방화동에 있다. 소나무, 참나무, 아가씨나무들의 양호한 임상(林相)을 간직하고 있다. 예로부터 물류수송의 운반로로 군사적 이동과 보급로였다.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이 발견되었고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다.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 수로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 군사요지였다.

개화산의 오른쪽 끝자락에 의지해 있어 산성 방어벽의 끝이어서 돌출부는 성곽의 끝이 되어 치(雉)로 이용되었다.

호국충혼비는 강서구 내촌마을길 19-81 개화동산 81-3 미타사에 있다. 6.25전쟁 때 김포비행장을 지키던 육군 제1사단 12연대 3대대의 대대장 김무종 소령을 비롯한 전사자 1,100여 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호국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38선 접경의 환태도연백지역 서부전선을 지키던 1사단 병력은 김포비행장 쪽으로 후퇴했다. 개화산에 방어진을 펴고 인민군 6사단과 대항하였는데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한 부대원 1,100여 명이 전사하였다.

1993년 호국충혼비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개화산 전투에서 신명을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분들의 고귀한 업적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추진위원회를 1994년 6월 28일 건립하였다. 개화산 전투 전사자 유족회와 국군 제1사단은 매년 6월 위령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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