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은 ‘달의 바위산’이다. ‘산꼭대기 바위 덩어리에 달이 걸리는 산’이다. 주봉우리가 신령스러운 영봉(靈峰·1097m)으로 불리는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 단 두 곳뿐이다. 영봉에 올라가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자산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음기가 강하다고 전해온다. 산의 실제 모습도 여인의 모습이다. 충주호 쪽에서 올려다보면 여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모습이고, 제천 덕산 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젖가슴이다. 미륵리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산 아래 덕주사에는 남근석이 3개나 서있다. 강한 음기를 누르려는 흔적이다. 

 영봉. 그 봉우리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덩어리다. 높이 150m, 둘레 4㎞의 바위덩어리다. 월악산은 설악산, 치악산과 더불어 3대 악산으로 부른다. 월악산을 언뜻 보면 소박하나, 살펴보면 설악 만큼 화려하고 지리산처럼 장엄하다. 기가 세다. 겨울 월악산은 한 폭의 수묵화라 꼽는다. 거뭇거뭇한 바위 곳곳에 쌓인 하얀 눈과 껑충 솟은 소나무는 독야청청 겨울 수묵화의 전형이다. 

 월악산은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죽은 후 동학의 남접 우두머리 서장옥(?~1900)이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현장이기도 하다. 남부군사령관 이현상(1906~1953)은 지리산에서 죽은 후 남은 빨치산들이 소백산맥을 타고 북쪽으로 도망가다가 죽은 곳이다. 조선말 명성황후(1851~1895)는 월악산에 별궁을 짓다가 그만둔 터만 남아있다. 월악산은 제천, 충주에 걸쳐있다. 소백산과 속리산 중간 위치에 충북과 경북의 경계에 있다. 제천지역의 바위들은 톱니 날처럼 뾰족하고 비탈길은 실낱처럼 위태롭고 험하다. 그래서 물길, 고갯길이 잘 통하는 충주지역에 사람과 물산이 모인다.

 남한강은 월악산을 휘돌아나가고 발밑의 충주호는 푸른 눈동자처럼 빛난다. 월악산은 통째로 충주호에 담겨있다. 구름이 호수 물속을 한가롭게 떠돈다. 산행은 주로 덕주골을 통해 영봉으로 올라가고 영봉에서 하산하려면 6~7시간이 소요된다. 

 월악산은 부처의 땅이다. 월악산 하늘재 아래 미륵리엔 거대한 미륵돌부처(10.6m)가 우뚝 서있다. 미륵돌부처는 북쪽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고 있다. 영봉아래 암벽에선 거대한 마애불(13m)이 남쪽의 미륵돌부처를 바라본다. 미륵돌부처는 마애불을 보고 웃고, 마애불은 미륵돌부처를 보고 웃는다. 두 부처의 거리는 남북 일직선으로 3㎞쯤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미륵돌부처는 마의 태자이고 마애불은 그의 누이 덕주공주’라고 말한다. 그들은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절을 짓고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남매가 서로 마주보며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두 부처사이에 오색 무지개가 펼쳐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두 부처는 모두 투박하다. 마애불은 아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여자의 형상인데도 큼직막한 눈, 코, 입에 늘어진 턱까지 언뜻 보면 유치원생이 그린 ‘삐뚤빼뚤한 그림’같다. 

 미륵돌부처도 전체적으로 돌돌 말려 균형이 맞지 않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가 원통형이어서 입체감이 부족하다. 얼굴은 마애불보다 한결 낫다. 가느다란 초생달 눈썹에 굳게 감은 일자 눈, 두꺼운 입술, 넙적한 코 등 나름대로 소박하다. 게다가 얼굴색이 언제나 하얗다. 이끼로 거뭇거뭇해진 몸체와 한판이다. 햇살이 얼굴에만 비쳐서 그럴까. 아니면 머리에 쓴 갓 덕분에 빗물을 피해서 그럴까.

하늘재는 소백산맥 잔등 중에서 가장 야트막한 곳이다. 해발 525m의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고갯마루다. 밑에서 보면 연 꼬리처럼 고갯길이 푸른 하늘에 걸려있다. 신라시대엔 계립령(鷄立嶺)이라 불렀다. 오늘날 ‘닷돈재-지릅재-하늘재’ 세 고개를 통틀어 계립령이라고 한 것이다. 지릅은 삼줄기, ‘겨릅’의 사투리, 닷돈은 엽전 다섯 돈을 뜻한다.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산적들에게 닷돈을 줘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계립령은 조선시대에 하늘재로 굳어졌다. 

 길이 열리면 세상이 열린다. 세상이 열리면 나라가 뻗어난다. 신라는 아달라왕3년(156년)에 마침내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하늘재를 뚫었다. 백제가 숨통을 조이고 있던 목젖을 확보한 것이다. 신라로선 일대 대사건이었다. 상주 - 문경을 넘어 충주(중원)로 가는 고갯마루가 활짝 트였다. 낙동강을 넘어 한강유역으로 갈수 있는 물길을 열었다. 

 오늘날 하늘재는 문경 관음리(聞慶 觀音里)와 충주 미륵리(忠州 미륵리)를 연결하는 길(약 3.5㎞)을 말한다. 지릅재, 닷돈재는 제외된다. 하늘재의 문경 쪽 시작점은 관음보살의 관음리, 충주 쪽은 미륵보살의 미륵리다.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현세부처와 언젠가 메시아로 오실 미래의 미륵부처가 한길로 이어져 있다. 관음리는 아스팔트길, 미륵리는 흙길이다. 의미심장하다. 하늘길, 미륵리에서 고갯마루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고갯마루가 반공중에 걸려있다. 

 지난 봄 충주호 청풍벚꽃 관광길에 월악산 송계계곡을 따라 충주 미륵리를 찾았다. 충주 미륵 대원지의 충주미륵석조여래입상, 충주미륵리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당간지주, 불상대좌를 감상하고 하늘재를 찾아 올라갔다. 미사토 모랫길 따라 포암산(961m), 만수봉(985m), 지릅재, 닷돈재의 고향 아닌가. 주위엔 탄항산도 도열해 있고 하늘재 가는 중간 쯤 휴게소 입구에는 ‘김연아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피겨여왕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스파이럴 자세를 닮았다. 

 ‘그대는 원래 천상의 선녀였나 / 참수리 날갯짓 우아하고 강력하게 / 그랜드슬램을 이룬 어느 날/
 월악산 하늘재에 / 숨겨둔 날개옷 찾아 입고 / 하늘로 돌아가기 전 / 마지막 연기를 떨치다가 /
 차마, 지상의 사랑을 떨치지 못하여 / 절정의 동작 그대로 / 한그루 소나무가 되었구나
(박운규 ‘김연아 소나무에서’)

비운의 마의태자가 월악산에 머문 까닭은 무었일까. 신라 마의태자는 아직도 전국 곳곳에 살아있다. 전설로 꿋꿋하게 남아있다. 1000여년의 세월도 ‘스토리텔링’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928)의 장남이다. 935년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다. 마의태자는 앞장서 반대하였고 신라 멸망 후 금강산에 들어가 풀뿌리 캐어 먹고살다 죽었다.

그의 이름은 김일(金鎰) 혹은 김부(金富)라고 한다. 동해안 따라 금강산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왜 쉬운 길을 두고 험한 내륙 산길을 택했을까. 경주~영주 부석사~문경~월악산~여주 신륵사~양평 용문사~홍천~인제~금강산으로 향했다. 양평 용문산에 지팡이를 땅에 꽂아 단단히 뿌리를 내려 못 다한 신라천년사직을 대신해달라고 기원했다. 지금도 용문사엔 천년은행나무가 서 있다.

당시 충주는 막강한 호족 유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월악산 미륵사는 충주 유씨 후원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덕주공주와 덕주사도 같은 맥락이 아닐가. 호족 유씨는 왕건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다. 왕건~충주 유씨의 딸과 결혼하여 사돈지간이 되었다. 충주호족이 무엇이 아쉬워 망한 나라의 태자와 공주를 감쌌을까 의문이 남는다. 차라리 유폐하고 감시하지 않고...

 신라 경순왕의 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다. 마의태자를 월악산 미륵사 연금한 것은 덕주공주와 분리목적이 아니었을까. 태자와 공주가 같은 곳에 있으면 구심점이 커진다. 충주와 가까운 청주에도 궁예를 따르는 호족이 많았다. 불안세력이었다. 청주호족 1,000여명을 철원에 이주시키기도 했다. 궁예 친위세력을 이룰 정도였고 왕견에게 반란을 꾀하다 진압되었다.

마의태자는 인제산악 지대에서 신라 부흥운동을 하던 흔적이 전설로 남아있다. 마의태자가 옥쇄를 숨긴 ‘옥새바위’, 마의태자가 수레타고 넘었다는 ‘수거너머’가 있다. 군량 저장했던 ‘군량리’가 있고 신라부흥운동의 중심이 김부리(金富里)로 남아 마의태자 휘하 맹장군의 이름에서 맹개골이 남아있다. 야사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강산에 숨었다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에 합류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