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방송에서는 ‘쿡방(요리방송)’, ‘집방(집꾸미기방송)’이 대세다. ‘chef의 전성시대’라고도 한다. 음식 조절을 처방하는 시간에 먹기 시합하듯! 그래도 ‘음식은 배려와 친절’이란 말은 기분 좋은 말이다. 궁중요리연구가 한복선씨의 시집 <밥하는 여자>에서 ‘굴전’이란 시를 골랐다.

 “치과 치료를 한 남편을 위해 / 만든 연하고 향기로운 굴전 / 음식은 배려 친절이다.
  어릴 적 굴 안 좋아했는데 / 어른이 되어 너무 맛있다 / 어머니는 석화 / 이제야 알겠다
  석화 ‘돌의 꽃’ / 바닷속 엄마의 젖향 보드라운 아가의 속살 / 훗날 내 몸에 베어진 그리움
  단단한 껍질 속 나 품고 바다 위 꼭 붙니 피어난 어머니”

소설가 성석제의 산문집 <소풍>속에서 군산 석화젓 이야기를 옮겨 놓았다. 어리굴절도 아니다. 흔히 배운 대로 담근 굴젓이란다. 첫눈 내린 뒤 두 번째쯤 되는 장날 군산에만 난다. 이 젓갈은 군산 앞바다에서 몇㎞ 떨어진 섬에서 나오는 것. 섬주민이 먹기 위해 담근 것. 배에 실려 군산이 고향인 사람에게만 맡긴 것. 흉년 자주 눈이 오면 팔려야만 양식을 구한다. ‘집밥시대’ 집꾸리기. 농촌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땅을 살 때 눈이 오면 사라는 권고다. 석화젓 팔리듯 농촌 땅도 눈이 와야 팔린다는 이치를 석화젓과 맞물려 써놓아 재미있게 읽었다. 

해마다 새해가 돌아오면 1년 밥상에 이 음식, 꼭 챙기라는 신문기사를 대하게 된다. 1월엔 단연 ‘굴’이다. 건강한 밥상, 튼튼하고 감성 있는 삶을 이해 올해는 눈여겨 챙겨보자. 굴은 한 겨울이 진짜 제철이다. 바닷물이 1도라도 더 차가워야 탱탱하게 씹는 맛과 감칠맛이 강해진다. 껍데기를 까지 않은 상태에서 입을 꽉 다물고 있어야 싱싱한 놈이다.

살은 통통하면서 탱탱하고, 전체적으로 우유 빛을 띠면서 테두리 빛깔이 선명해야 한다. 굴 산지에서 먹으면 이런 걸 따질 필요 없다. 경남 거제와 통영, 전남 여수와 장흥, 충남 보령, 전북 등 굴 양식을 많이 하는 지역에 굴 구이 전문식당이 몰려있다. 서해 굴은 갯벌이나 갯바위에서 산다. 그래서 갯굴이라고 한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물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수하식 굴보다 작지만 입안에서 씹히는 식감은 더 좋다. 서해 굴은 바다가 만든 것이 아니고 햇볕과 바람이 만든 맛이다. 

 ‘Eat oysters, love longer(굴을 먹어라, 그러면 사랑은 더 오래할 것이다)’ 굴에 관한 서양 속담이다. 서양에서는 수산물을 날 것으로 먹지 않지만 굴은 예외다. ‘사랑의 묘약’, ‘바다에서 나는 우유’, ‘먹는 화장품’, ‘배타는 어부의 딸은 얼굴이 까맣고, 굴 따는 어부의 딸은 피부가 하얗다.’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굴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굴을 석화라고 불렀다. 굴의 모습이 마치 돌에 꽃무늬처럼 새긴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또 ‘석화(石華)’로 표기하기도 했다. 돌에 새긴 화려한 꽃무늬라는 뜻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翼)도 굴을 꽃 같다고 했다. “무정한 물건이 정이 있는 꽃을 피웠다. 껍질의 빛깔이 피지 않은 꽃 같다.”고 했다.

<도문대작>이란 요리서를 펴낸 교산 허균(許筠)은 “굴은 고원(함남)과 문천(강원도)서 나는 것이 크다. 맛은 서해에서 나는 작은 것이 낫다. 윤화(輪花)는 동해에서 나는데 석화와 같다. 큰 것이 맛있다.”고 했다. 충청도 해미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도 굴을 소재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제 신선한 석화가 성연(서산지방)에 도착했다. 갯가 보리가 누를 때 그 맛이 뛰어나다”고 읊었다. 

굴은 예부터 식용 혹은 약용으로도 썼다. 조선 인조는 석화탕(石花湯)으로 목의 통증을 가라 앉혔다. 선조 때의 유희춘은 “석화는 해롭지 않다. 그 성질이 차다. 해롭진 않지만 많이 먹는 것이 좋지 않다.”했다. <산림경제>에서는 ‘굴김치’는 굴에 소금을 치고, 무파 흰 줄기를 가늘게 썰어 넣고 합친 다음 간이 배면 국물은 쏟아내고 끓여 국물이 미지근해지면 건더기를 넣어서 따뜻한 곳에 둔 다음 하룻밤이 지나면 먹는다.

굴은 동양 삼국이 모두 좋아했던 식재료였다. 풍랑을 만나서 일본 쪽으로 표류했던 어부들도 굴을 따먹고 생명을 유지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한반도에 와서 굴을 찾았다는데, “오는 길에 맛있는 굴을 항상 대접받았기에 한양도성에 오면 마음껏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한양에서는 굴을 주지 않는가?”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회자되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고든램지 요리학교 ‘탕테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정도현세프의 서양굴요리 이야기를 옮겨보았다. 

“한국에서 다 똑같은 종류의 굴이다. 서양에는 굴 종류가 다양하다. 프랑스 종자 핀드클레르는 작지만 고급스러운 맛을 낸다. 우리가 잘 먹는 태평양 굴, 납작하고 큰 호주 특산의 바위굴 등 서양에선 지역별, 생산자별로 종류를 세분화한다. 서양에서 굴은 특별하게 대한다. 특히 프랑스 굴은 특별대접을 받고 양식기법이 최고여서 최고수준의 비싼 값을 받는다.” 

“서양의 레스토랑에서는 주문을 받고 나서 굴을 깐다. 마트에서 ‘봉지굴’을 사먹거나 ㎏단위로 굴을 팔고, 숟가락으로 굴을 파먹는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답답하게 들린다.”

“굴을 먹는 방법도 다르다. 서양에서는 보통 간단히 레몬향을 뿌리거나 세리식초에 살럿과 후추로 만든 미뇨에트 소스를 쳐서 먹는다. 시리식초는 와인에 알코올을 첨가해 도수를 높인 주정강화주 세리를 발효해 만든다. 투명한 적색에 푹 익은 포도향이 은은하다.”

‘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역사 속 한식’의 희한한 옛날 굴 이야기를 옮겨보았다.

조선 연산군 때 ‘유자광의 굴·전복상납사건’은 흥미롭다. 1499년 1월 사간원 정언 윤언보가 유자광을 탄핵한다. “유자광이 함경도에 갔을 때 무리하게 전복과 굴(石花)을 챙겨, 불법으로 역마를 차출, 사적으로 임금에게 전복, 굴을 상납했다. 불법이다. 국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즉위 5년차 살아있는 권력’자 연산군은 이 뇌물을 받은 이다.

“유자광이 어찌 다른 생각을 했겠는냐? 그저 좋은 걸 보고 나한테 가져다주고 싶었겠지” 이 상소는 시작이었을 뿐, 그해 2월 23일에는 사간원, 사헌부 전체가 나섰다. 결국 연산군은 유자광을 도총과의 지뢰에서 파면했다. 2년 후 1501년(연산군7년) 11월에는 한치형이 ‘역상소’를 올렸다. 사간원 등의 “굴·전복 관련 상소는 잘못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한치형은 자기 직을 걸고 사직의사를 밝히지만 연산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6년 후 1505년(연산군11년) 2월, 연산군의 반격이 시작된다.

사간원, 사헌부의 “유자광의 굴·전복 관련 탄핵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이다. “사간원 정원, 윤은보와 사헌부 지평 권세형이 탄핵한 유자광의 굴, 전복 상납은 죄가 아니다. 그게 무슨 아첨이며, 죄인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윤은보와 권세형에게 다른 뜻이 있을게다. 그 내용이 밝혀질 때까지 고문하라.”고 지시했다.

연산군의 주장 “ 나이 많은 유자광이 굴 따위를 진상하여 무슨 나의 은총을 기대하겠는가. 필시 탄핵 상소자들은 권력자 집안 출신이고 유자광은 천한 집안 출신이라 업신여긴 것이라는 게다. 6년 전의 굴상납관련 상소문을 문제 삼은 사건은 두 달 후 의금부에서 판결이 떨어진다.

탄핵에 앞장선 안윤덕은 곤장 80대, 처음문제 삼았던 윤은보는 곤장 70대였다. 그러나 1507년 4월 정권이 바뀌어 중종2년엔 사간원에서 다시 유자광의 굴·전복 사건을 문제 삼게 되었다. ”탄핵내용 중 재미있는 표현이 나타난다. ‘호미(狐媚)’, ‘여우눈썹’이다. 사람을 홀린다. 아첨하여 혼을 빼 놓는다. 사간원은 ‘전복과 굴을 드려 임금을 호미했다.’고 탄핵한다.

중종은 “이미 유자광이 벌을 받았으니 더 이상 재론치 말라”는 입장이고 신하들은 강경했다. 강경한 신하들은 상훈, 관직을 모두 삭제하고 중형에 처해야 한다. 자손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중종은 거부했다. 결국 8년 만에 유자광의 굴·전복 상납사건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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