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서촌 삼청동?북촌은 지난 10여 년간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부동산 가치의 상승은 이곳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옥 덕분에 국내외 관광객 방문이 급증했다. 부동산이 뛰어 땅값, 임대료, 권리금이 껑충 뛰었다. 그 옛날 정겨운 모습과 정취는 나날이 퇴색하면서 주민이 떠나고 있다.

특히 경복궁 마을이 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변모하면서 임대료와 권리금이 크게 뛰었다. 삼청동 중심지에서는 1층 33㎡(10평)상가의 임대료가 2005년엔 보증금 1억원에 월세 500만원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증금이 2배인 2억원에 월세는 700만원으로 올랐다.

서촌을 비롯하여 경복궁 마을의 변화는 주거공간이 상업지구로 변하면서 유동인구가 늘고 부동산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옥은 재평가를 받으면서 주민의 자긍심이 높아졌지만, 급속한 상업화에 따른 극심한 가격 변동으로 지역의 독특한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독특한 주거공간의 매력이 카페, 식당, 주점 위주의 천편일률적 변화로 상주인구가 줄어들므로서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

‘나 그대와 둘이 걷던 그 좁은 골목 계단을 홀로 걸어요’ (서태지 9집 ‘소격동’)

가수 서태지(본명 정현철)는 어린시절 소격동에서 살았다. 그의 집이 현재 국제 갤러리 오른편에 있던 단독주택이었다. 주민들의 말이다. 서태지 가족은 이후 평창동으로 이사를 갔다.

“얼굴도 곱게 생기고 참 조용했던 학생” 서태지를 기억한다. 주민들의 말이다.

체부동교회가 서촌에선 변화 보전기로에 서있다. 아이들 사라진 골목엔 구경꾼만 넘쳐 카페, 식당에 밀려 교회도 문 닫을 판이 되었다.

“손님만 많아지고 주인(주민)은 떠났기 때문”
“수많은 젊은 연인이 손잡고 이곳을 찾고 있지만 이곳엔 뛰노는 아이가 없다”

경복궁의 서쪽 지역 서촌엔 조선시대 역관, 의관, 궁녀, 화가, 서예가들의 집과 숙소가 있었던 곳이다. 사대부들은 해가 지는 서쪽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인, 예술가들이 유난히 많이 살았다.

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근대 천재시인 이상, 시인 윤동주, 화가 이중섭, 박노수 화백, 시인 노천명과 최근 타계한 화가 천경자는 서촌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서촌에는 가옥이 약 2108채 있고 이중 30%인 668채가 한옥으로 보전되어 있다. 서촌 한옥은 북촌 한옥과 달리 일제강점기에 대량으로 지어진 한옥들이다. 한옥의 크기도 작고 좁은 골목길에, 북촌의 고관대작의 집처럼 웅장하지도 않다.

서촌은 도심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미로같은 골목길 안에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안내판이 붙은 집을 만나게 된다. 이상, 노천명의 집도 발견할 수 있다. 윤동주는 이곳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인왕산 중턱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관이 있다. 한국화의 거장 박노수 화백의 집은 이제 박노수 미술관이 되어있다.

우리의 아픈역사,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 순종이 합병조약문서에 대한제국 옥쇄를 찍게 했던 악랄한 인물, 윤덕영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면서 일제로부터 귀족작위와 엄청난 재산을 받아 서촌 일대 절반에 가까운 땅을 사들여 벽수산장이란 저택을 짓고 호화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 박노수 미술관에는 기둥만 남은 벽수산장터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배화여고는 1898년 미국출신 조세핀 캠벨 선교사가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이었던 이곳을 1910년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을 담아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16년 서양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배화여고 생활관은 건축미와 함께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 배화여고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영부인 고육영수 여사가 졸업한 학교다.

서촌의 또 다른 이름이 ‘세종마을’이다. 조선 제3대 태종이 왕자시절 서촌에 살며 1397년 셋째 아들을 얻었다. 세종대왕이시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을 서촌의 간판에 모두 쓰고 있다. 경복궁 옆 옛 ‘준수방’지역에 한글단체는 민간건물을 매입하여 생가 터도 복원하면서 세종대왕 탄생 추정지에 한글기념관을 짓고 있어 종로 통인동에 2017년 준공 예정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과거 국군기무사령부가 사용하던 부지에 세워졌다. 서울관은 마당개념을 도입하여 주변과 어울리게 조성하여 건물 내?외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전에 있던 기무사 건물, 조선왕조 종친부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의 의미를 지닌 건물이라 자랑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덕수궁관, 과천관에 이어 세 번째로 2013년 개관했다. 총 8개 전시실이 있어 참여용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박스에선 초청된 유명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무료 관람일이다.

서울관이 들어선 부지는 조선시대 소격서(昭格署), 종친부(宗親部), 규장각(奎章閣), 사간원(司諫院)이 있던 자리였다. 일제강압기엔 일본군 육군병원, 경성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사용되다가 6.25 전쟁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 수도육군병원, 기무사(紀務司) 등이 위치했던 역사적 유래를 지닌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서울관은 미래지향적 명소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아간다. 필자는 1962년부터 5년간 수도육군병원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옛날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165번지였다. 지금은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번지다.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를 나와 율곡로를 따라 광화문 정문 앞에서 동십자각을 만나 삼청로로 들어선다. 그 왼편은 경복궁이다.

경복궁 동쪽문을 건춘문, 서쪽문은 영추문이다. 동십자각 주위로부터 삼청로 따라 서울관에 이르는 길은 1960년대는 개천이 있었고 남쪽으로 종로통까지 가는 길엔 개천이 흘러갔는데 그곳엔 청진동, 피맛골길, 열차집은 퇴근 후 빈대떡에 막걸리파티 그리고 가까운 병원들의 야간 당직들은 일이 끝나면 해장국으로 피로를 풀던 서울의 명소가 지척이었다.

지금은 동십자각 앞으로 삼청공원을 향하여 넓은 길옆에는 갤러리 현대(본관), 불일미술관, 갤러리 현대(신관), 금호미술관, 한성부 북부관아터 표지를 지나면 사간원터가 있고, 아프리카 미술관, 갤러리온 그리고 율곡로 따라 개럴리 송아당, 심여화랑이 줄서 있다. 옛 수도육군병원 아래 담장 밑에는 한식 불고기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화랑갤러리로 변신했다.

다음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차례다. 옛 수도육군병원 위병소, 기무사 위병소 같은 시설은 사라지고 서울관 입구에는 옛 건물과 서울관 새 건물이 조화롭게 나열되어 한층 더 밝은 분위기다. 서울관 뒤편에는 종친부 경로당과 옥첩당, 종친부우물 등이 잘 정돈되어 있다. 종친부 뒤편 길 율곡로1길 따라 이화갤러리, 아트선재센터, 그 앞길은 북촌35길이며 트렁크갤러리, 갤러리조선이 있고 북촌35길따라 서울교육박물관 김옥균 집터 지나면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정독도서관이 기다린다.

경복궁 근처 동쪽엔 화동, 안국동, 서쪽엔 삼청동, 남쪽으로는 송현동, 사간동이 있고 북쪽으론 팔판동이다. 소격동은 법정동이며 행정적으로는 삼청동 관할에 속한다. 조선시대 국가적인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 소격서가 있었고 2013년 옛 기무사 건물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되었다. 현대미술관 뒤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 종친부가 있다. 조선시대 종실 제1군에게 관직을 제공하고 이들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한 관청이었다. 한옥밀집지역 북촌에 속하는 소격동은 카페, 옷가게,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소격동이란 동명의 유래는 도교의 대청(大淸), 삼청(三淸), 옥청(玉淸)의 삼청성신(三淸星辰)을 모신 삼청전의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 소격서(昭格署)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를 벗어나면 율곡로3길 따라 정독도서관을 찾아올라가자면 이곳저곳에 근세 역사인물들의 발자취가 갈 길을 붙잡는다.

인사동 건너편, 주말은 차 없는 거리다. 100% 북촌 감성여행길이 된다. 인현왕후와 명성왕후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건물 감고당(感古堂)은 덕성여중과 덕성여고 사이에 감고당터가 남아 있다. 감고당은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로 이전되었다. 지금 그 지역은 벼룩시장, 카페,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삼청동 호떡, 샛별당 닭꼬치 가게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모여든다.

별궁길은 안국역 1번출구로 나와 우측 골목길이다. 감고당길과 한 블록 차이다. 정식 명칭은 윤보선길이다. 윤보선가(사적 제438호)는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가 살다가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친이 구입하여 4대 째 살고 있다.

율곡로3길 따라 올라가면 북촌 정독관광안내소 입구에는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다. 과거 교과서, 교복, 교실, 문구사를 재현해 놓았다. 교육 변천사를 살필 수 있는 전시관이다. 정독도서관은 전근현대사를 유추할 수 있는 유서 깊은 장소가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사육신 성삼문의 집터, 김옥균 집터, 화기도감터, 그리고 동아일보 창간 사옥터가 몰려 있다.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서재필 그러나 정변 실패 후 고종황제는 우리나라 최초이ㅡ 관립 중?고등학교를 건립하니, 경기고등학교였다. 1938년 건립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였다. 스팀난방시설이 되어 있었고, 명문 고등학교였다.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한 후에 그곳엔 정독도서관이 세워졌고, 근대 건축등록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수령 300년 보호수, 봄 벚꽃터널, 가을 단풍은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메드월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