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란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금강산으로 가는 입구라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양구는 백두대간에 의지한 고장이다.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로호와 소양호를 양팔로 잡고 있다.

백두대간상의 산들로 1000m를 넘는 산들이 진을 치고 있다. 사명산(1,199m), 백석산(1,365m), 대암산(1,316m), 도솔산들이다. 공장이 없는 고장으로 이름이 난 양구는 생태고장이란 슬로건이 어울리는 고장으로 대륙적인 자연을 만끽하기에 안성맞춤인 고장이다.

양구는 특이한 고장이다. 백두대간에 기대어 있으면서 천년고찰이 없다. 국보는 물론 보물조차 없다. 고인돌을 제외하면 중요 문화재도 귀하다. 고택이나 사원이 없다. 역사는 길지만 인문적 토양은 약하다. 흔히 그 고장의 풍수를 알려면 고장 출신의 걸출한 인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풍수연구가들의 말이다. 풍수는 사람을 통해 그 고장의 무늬를 만든다는 이론이다.

사람이 만든 무늬와 빛깔이 인문(人文)이라 한다. 큰 인물의 생가나 무덤, 공부한 서원이 가지고 있는 무늬와 빛깔을 보면 그 고장의 풍수를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한 역사적 인물들의 배출을 보면 양구는 판단하기에 오리무중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가 이주하는 유형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방 관료로 부임하여 산천이 수려하고 인심이 후하여 머물러 사는 경우이고 둘째 장가를 가서 처갓집 마을에 눌러 앉아 사는 경우이며 셋째는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제2의 고향으로 삼는 경우이지만 양구로 이주하여 큰 인물로 성장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풍수는 인문(人文)이다. 양구는 산수(山水)는 있어도 풍수(風水)는 없다. 양구엔 풍수문화가 없다한다. 양구땅은 거칠고 돌이 많아서 농산물의 수확이 풍부하지 못한 지역이다. 논밭이 넓어 먹거리가 많이 나와야 사람이 살기 좋다. 사람이 모여든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을 산수(山水)라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사람이 살만한 곳의 네 가지 요소 중 하나가 산수다. 오늘의 용어로는 힐링과 휴식을 위한 자연공간이다. 기거하는 곳에서 한 시간 이내에 수려한 산수 즉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자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동차로 움직이는 현대인에겐 2시간 거리까지 될 듯싶다. 그래서 양구는 서울에서 두 시간, 산수(山水)의 고장으로 안성맞춤이다. 넓은 호수, 높은 산이 있어 계곡이 발달해 있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고장이다. 산수 자연은 인간의 지친 몸을 치료해주고 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두타연은 산수의 으뜸이다. 양구는 산수(山水)다.

순박하며 농사에 힘쓴다.

학문과 무예도 숭상하며, 일부는 생원이나 진사도 나오고 문과 무과에 합격한 인재도 나왔다. 
양구군 <신중국여지승람> 속에 실린 내용 일부다.

양구군을 노래한 송구빈은 “고을이 고요하니 마음마저 고요하고 사람이 드무니 할 일도 드무네”라고 노래했다. 양구군은 고구려때부터 독립된 고을이였다. 그 이름은 한 번도 바뀐 때가 없었다. 양구는 궁벽한 산골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르도록 현령을 두지 않았다한다.

비봉산에는 삼한시대에 석성으로 쌓은 비봉산성이 있었으나 허물어져 잔해만이 남아있다. 양구 향교는 양구가 독립된 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화재다.

양구군은 화천호와 소양호, 그리고 높디높은 산으로 애워싸인 고을이다. 강원도에서도 궁벽한 고장으로 소문이 자자한 이 곳을 찾았던 사람이 고려 때의 문장가 김극기였다. 양구의 자연을 노래했다.

양구에는 함춘역과 수인역 두개의 큰 역원(驛院)이 있었다.

강원도 강구(楊口) 상당수의 대한민국 남성에게 ‘군대’와 함께 연상되는 지역이다. 20대 젊은 남성들이 양구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1980년대 양구에서 군복무를 끝낸 사람들은 볼거리도 즐길 거리도 별로 없어 여행지가 되기 힘들다 믿는다.

양구! ‘없는 게 많아서 더 좋은 곳’ ‘있어서’보다 ‘없어서’더 좋은 여행지다. 군청에 있는 양구 읍내는 한적했다. 자동차와 사람이 드문드문 보였다. 거리엔 신호등과 표지판이 모두 갖춰졌지만 지나다니는 차가 별로 없어서 마치 운전면허 시험장에 온 듯했다.

세상이 발전하면 할수록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굽은 길은 펴지고 높은 산 아래는 터널이 뚫리면서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은 최단거리로 연결된다.

‘속도와 시간’만으로 오지를 잰다면 ‘우리 땅에 이제 오지는 없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그러나 양구는 세상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오히려 멀어진 곳이 되었다. ‘전쟁의 상흔’, ‘분단의 정서’가 겹친 양구는 ‘춥고도 먼 땅’으로 기억되면서 심리적으로 더 먼 곳이 되기도 했다. 한때 양구는 강원도청이 있는 춘천에서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천천히 달려도 40분 정도면 넉넉히 가 닿을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소양호가 생기면서 춘천과 양구를 잇는 길이 온통 수몰되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많지 않던 인구가 더 줄어들었다. 현재 양구군의 인구는 2만 5천명을 상회하지 않는다. 양구 면적은 약 701㎢로 서울의 면적 약 605㎢보다 훨씬 넓다. 그런데 서울 인구 1,200만 명과 비교할 수 없이 적으니, 양구는 한적한 곳이다.

그리고 양구는 춘천에서 꼬박 2시간 반이 걸리는 먼 곳으로 물러났었다. 그래서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육지 속 섬’이란 이름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분단에 가려진 비밀의 원시림의 때묻지 않은 풍경은 가꾸어나가야 할 우리의 재산이다.

옛 46번 국도를 달리던 기억도 새롭다. 소양댐이 생기면서 댐둑을 따라 꾸불꾸불 이어지며 양구를 찾아가던 옛 국도는 배후령터널을 위시하여 추곡터널, 수인터널, 웅진터널, 웅진1터널, 웅진2터널, 공리터널이 뚫리면서 직선화되어 춘천과 양구는 1시간 남짓 거리로 가까워지고 1912년 춘천의 북쪽 산자락을 아찔하게 넘어야 했던 배후령 고갯길에 전장 8.8km짜리 터널이 뚫리면서 춘천과 양구는 20분 거리로 짧아졌다. 서울 춘천간에는 고속도로가 놓였으니 수도권에서 양구는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시간의 거리(距離)는 짧아졌다 해도 양구는 아직은 여전히 먼 땅이다.’

비무장지대(DMZ)에 인접한 양구에는 디딜 수 없는 땅, 건널 수 없는 강, 오를 수 없는 산들과 미확인 지뢰지대, 출입통제 군 작전지역으로 간간이 총소리, 대포소리가 들리는 군사격장이 있다. 댐과 호수로 그리고 전쟁과 반목으로 고립되고 통제된 땅에는 자연은 제 스스로 깊어가고 울창해졌다.

한반도의 배꼽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두 개의 호수가 겹친 곳이 드물고 그 두 호수를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더더욱 드물다. 양구의 대표적인 명산은 사명산(四明山,1198m)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설악산, 소양호가 아름답게 보인다.

북쪽으로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파로호에 물을 넘긴다. 사명산이 품은 뜻처럼 양구, 춘천, 화전을 비롯해 멀리 인제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금강산 매자봉(1,144m)에서 시작하여 도솔산(1,148m)과 대암산(1,304m) 사명산을 지난 후 북한강과 소양강을 만나는 우두산(133m)까지 이르는 123km의 도솔지맥(兜率枝脈)에 해당된다.

사명산은 북으로 파로호가 에두르고, 남쪽으로는 소양호가 휘감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도솔지맥은 백두대간 매자봉 부근에서 갈라져 나와 도솔봉을 넘은 뒤 용늪 옆을 지나 대암산 정상으로 가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흐르며 소양강 북쪽울타리를 이룬다. 여기서 대암산 남쪽 도솔지맥에서 한가닥 옆으로 갈라져 나온 능선에서 솟은 봉우리가 바로 솔봉이다. 양구의 동쪽 산악지대 사이에 솟은 대암산 솔봉은 광치계곡과 후곡 약수터, 생태식물원을 품고 있어 눈, 귀, 입이 즐거워지는 백패킹 대상지다.

대암산은 한반도 휴전선 아래 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산늪지 용늪(천연기념물 제246호)을 감추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신비감을 발산한다.

1180m 산지에 형성된 이 늪은 남북으로 약 100m 크기다. 정상 남서쪽의 작은 용늪과 큰 용늪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칼잎용담, 끈끈이주걱, 북통발 등 160여종의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봉화산(烽火山,875m)은 양구읍과 남면 일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양구읍에서 정남향에 위치해 있다. 봉화산 북사면은 군사격장이 있다. 2002년 이후 우리나라 국토 정 중앙지점이다. 산 이름은 조선 선조37년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얻은 이름이다. 비봉산은 양구 동쪽하늘을 밝히는 양구의 진산이다. 정상에 서면 양구의 전망대다. 양구 서천은 파로호를 향해 굽이치며 산을 감싸며 흐른다.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고 봉화산, 사명산, 배암산, 백석산,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을 조망할 수 있다.

매년 해맞이 행사를 하고 있다. 삼한시대엔 둘레 892척 높이 8척의 비봉산성이 비봉산에 있었다 전한다. 파로호 수변 국가 생태문화 탐방로 1,2구간이 자랑거리다. 마을길, 숲길, 계곡길을 통해 오르막과 내리막, 평지, 직선과 굴곡, 고루 섞인 산책로다. 파로호, 수입천, 파서탕 등 잘 보전된 자연경관이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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