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자정 가까운 시간, 불길이 숭례문 문루로 번져나갔다. 한 소방관이 문루에 붙은 현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현판은 분리되는 순간 균형을 잃었고, 소방관은 현판을 떠받치려 애를 썼지만 결국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현판은 길이 3.5m, 무게 150kg에 이르렀다.

지면으로 떨어진 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데 8명이 동원되었으니, 소방관 한 사람이 혼자서 크고 무거운 현판을 지탱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현판은 크게 손상되었지만, 1년 만인 2009년 7월 복원된 모습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손상치료의 4단계 최신공법을 거쳐 소생했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서울 성곽의 다른 성문과는 다르게 세로로 쓰여 있다. 숭례문에서 가운데 글자인 ‘례(禮)’자는 오행(五行)에서 불을 의미하고, ‘숭례(崇禮)’ 두 글자를 세로로 쓰면 마치 불꽃 타오르는 형상이 되므로 이 화기(火氣)로써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보려 했다는 것이다.

불을 불로써 다스린다는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방법을 적용한 셈이다. 관악산을 화산(火山)이라 하는 것은 이 산이 불의 형상처럼 생겼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관악산 봉우리 부분을 보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처럼 생겼다.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달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숭례문 현판이 세로로 달려 있는 이유를 역사적 사건과 연관지어 기록한 문헌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 없다.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또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현판을 세워서 달았다는 것은 하나의 속설일 뿐이다. 숭례문 현판 글씨를 바라보며 힘 있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씨는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가 추사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도 감탄했다고 전하는 명필이다.

추사가 숭례문을 지나칠 때면 성문 앞에 서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현판 글씨를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다. 이 감동적인 글씨를 쓴 분은 누구일까?

다섯가지 설이 있다. 그 중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이 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수광(李睡光ㆍ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이긍익(李肯翌,1736-1806)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그리고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考)>에서도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판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筌散稿)>에서 정도전(鄭道傳ㆍ1342-1398)이 이름을 지었고,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 전기의 문신 서예가 정난종(鄭蘭宗)이 썼다고 기록하였다. 셋째, 추사 김정희는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에서) 숭례문 현판의 글씨가 신장(申檣)의 것이라고 썼다. 신장은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신숙주의 아버지다.

넷째, 세종의 셋째 아들로서 당대 최고의 명필가로 손꼽혔던 안평대군이 숭례문의 현판을 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다섯째, 일제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別乾坤)> 1929년 9월호에는 숭례문 현판이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건 오해고, 중종 때의 명필 유진동(柳辰仝)의 글씨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한분인 오세창도 1928년 그가 편찬한 역대서화가 사전인<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숭례문 현판의 글씨가 유진동의 것이라고 했다.

숭례성터길 따라 걸어보자. 숭례문 광장에서 왕복 10차선 ‘남대문로’를 건너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방면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길가에 ‘남지’라는 연못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시대 때 관악산의 불기운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 연못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수적 장치 외에도 당파 세력 가운데 하나인 남인(南人)을 상징하기도 했다. 조선 중기 남인의 집권을 막으려는 세력이 남인의 번성을 남지 탓으로 보고 연못을 메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순조때에는 남지를 복원하자 ‘전에 이 연못을 다시 파니 남인인 허목(許穆)이 득세했는데 이번엔 누가 득세할까’하는 말이 나돌더니 ‘역시나 남인인 채제공(蔡濟恭)이 득세하였구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남지 표지석 지나면 곧 ‘칠패길’과 만난다. 칠패길은 조선 후기 이곳에 형성된 칠패시장에서 유래한다. 칠패(七牌)는 지명이 아니라 이 구역의 도성수비를 담당했던 금위영소속 ‘7패’부대를 의미한다.

‘패(牌)’란 40~50명으로 구성된 가장 작은 부대단위로서 오늘날의 소대와 중대 사이 규모에 해당한다. 조선후기에는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도성의 수비 및 정비구역을 분담했다. 돈의문에서 숙정문까지 훈련도감, 숙정문에서 광희문까지 어영청, 그리고 광희문에서 돈의문가지 금위영이 맡았다. 이곳 칠패길 일대 수비 책임 군문(軍門)은 금위영이었다. 어떤 사람은 숭례문 밖에 있었던 칠패시장이 숭례문 안으로 옮겨져 오늘날 남대문 시장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칠패길 건너면 대한상공회의소와 만난다. 이 건물 앞에서 숭례문을 바라보면 성문 일대가 약간 높은 지대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평평해 보이지만 실상은 남산에서 내려온 산줄기 위에 숭례문이 서있다. 이 능선은 숭례문과 소의문 그리고 돈의문을 거쳐 인왕산(仁王山)으로 이어지고 인왕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창의문을 거쳐 북악산으로 연결된다.

이런 지형 특성은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이 남쪽으로 직류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숭례문이 서있는 지점은 도성 안의 종로와 을지로 방면과 도성 밖의 용산 방면을 가르는 분수계(分水界)상에 있다.

북악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강원도와 함경남도 경계인 추가령에서 갈라져 나온 함북정맥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산이다. 따라서 산줄기 따라 추가령까지 걸어갈 수 있고 이곳에서 백두대간까지 종주할 수도 있다.

숭례문은 도성 정문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5년 서울성곽 축성을 명하였다. 오늘날 숭례문은 태조 때 것이 아니라 세종 때 새롭게 만들어 성종 때 보수공사를 마친 건축물이며 그 역사가 심히 웅건하다. 조선시대 숭례문은 중요문화재였다.

성문을 훼손시킨 사람은 그 처벌이 엄격하였다. 성문 좌우 성벽에 불량배(무뢰인ㆍ無賴人)들이 붉은 글씨, 검은 글씨로 낙서해 놓아 바라보기 불쾌하였을 때는 숭례문 수문장에 죄를 물어 엄히 다스리고, 해당 관청의 관원이나, 가까운 곳에 사는 마을사람들(坊內人) 거느리고 깨끗이 지우게 하소서라는 상소문도 빗발쳤다고 한다.

낙서자 있으면, 수문장과 성문 지키는 마을사람(坊內分宗人)이 현장 체포, 투옥 죄를 묻게 했다. 오훼제서율(誤毁制書律)로 다스렸고 임금이나 세자가 조서(詔書)로 내린 명령을 손상시킨 자로 물간사전(勿揀赦前)으로 특별사면을 못하게 하며, 불고지죄도 엄한 죄로 다스렸다.

1907년 일제는 도시계획명목으로 서울성곽을 숭례문 주변부터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드문드문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보도블록은 옛 성곽길을 표현하기 위해 돌로 깔았다.

그 길의 이름은 ‘숭례성터길’이다. 숭례문과 서울성곽이 지나갔던 길을 의미한다. 대한상공회의소 건물과 명지빌딩 담장도 성곽을 재현했다. 옛 흔적 찾아 도심산책은 우리 문화유산답사 코스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 6.25전쟁 등 숱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600년 오랜 세월을 이겨냈다. 숭례문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요 외침에 쉽게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정신의 상징이었다. 감동적 문화재가 5시간 만에 주저 앉았다. 복원비 3년 새 250억원 그러나 숭례문과 함께 무너진 우리의 마음은 어찌하는가.

2010년 2월 10일 숭례문 복원 착공식을 하였다.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지 정확히 2년 째 되는 날이었다. 성문과 성곽 복원에 현대 기술이 아닌 전통의 기법을 적용하였다. 옛날 사람들의 손기술이 성돌에 녹아들어가도록 돌을 자르고, 다듬는 작업은 메나 정 등의 전통공구를 사용하고, 전기톱 대신 도끼, 톱, 대패 등의 기구를 사용하였다.

공사 인부들은 한복을 입고 작업했다. 전통기법으로 숭례문을 복원해 놓았다. 600년 역사를 살려 놓아 600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 고귀성을 되살리는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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