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莊陵)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1441~1457)의 단릉이다. 단종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아들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후 출산후유증으로 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종은 세종(제4대)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단종은 10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고 2년 3개월 만에 문종이 승하하자 12세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20세 이하의 미성년자가 왕이 되면 전왕의 부인인 대비나 전전왕의 부인인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불행하게도 단종에겐 수렴청정 해줄 어머니도, 할머니도 살아게시지 못했다. 그래서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단종을 보위하며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이끌어 나갔다. 결과적으로 왕권은 약해졌고 몇몇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갔고, 수양대군 등 왕족들의 반발과 함께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도 황표정사의 폐해를 거론하였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 자주 드나들자 김종서와 황보 인은 온건한 안평대군과 손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했다. 수양대군은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자청하여 다녀오기도 했는데, 사실은 정적들을 방심하게 하는 정치적 술수였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 황보 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수양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여러 중요 직책을 겸직하였다.

단종은 1454년 송현수의 딸(정순왕후)을 왕비로 맞아들였지만 어린 왕과 왕비를 지켜줄 세력을 얻지 못했다. 그 이듬해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보낸다. 어린 왕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나이 어리고 중외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가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증후가 끊이질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맡긴다.”는 교지를 내리고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것을 통보한다.

1456년 상왕자리에 있던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등 사육신이라 불리는 집현전 학사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인들까지 모두 사형당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457년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기도사건 까지도 발각되어 단종은 더 깊은 곤경에 빠졌다. 단종은 서인(庶人)으로 강봉되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단종이 묵고 있던 관풍헌에 도착했지만 차마 단종에게 내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복득이란 하인이 단종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단종을 시해했다. 그 하인은 그 건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데 어떤 벼락인지는 상상이 된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은 역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하며 시신을 동강에 흩어버리라 엄명했다. 그런 와중에 영월 호장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거뒀다. 그는 야반에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였다. 그로부터 59년 후 중종 때 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내려졌는데 엄흥도 가족이 자취를 감춘 뒤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영월군수였던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묘를 찾게되었다.

이때야 비로소 봉분을 갖추었지만 장명석, 망주석 등 어느정도 상설(象設)을 갖춘 것은 선조때인 1580년의 일이었다. 또 그로부터 100년 후 1698년 숙종 때에 이르러 단종이라는 묘호(廟號)와 장릉(莊陵)이란 능호를 얻게 되었다.

엄흥도가 암매장 했던 그 자리에 능침을 그대로 마련했기 때문에 장릉은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능침 앞쪽으로 정자각을 만들 공간이 없어서 가파른 언덕 아래쪽에 정자각과 참도가 있다. 장릉에는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이 없다. 혼유석, 장명등석 하나씩과 망주석, 문인석, 마석, 호석, 양석이 각각 한 쌍씩 서있다. 석물들은 능제간소화 바람이 불던 숙종 때 만들어진 것이라 왜소하면서도 간단하다. 능역 안에는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기리는 여러 시설이 들어서 있다.

정조 때 공조판서로 증직된 엄홍도의 정려각,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충신단,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이 있다.

영월 장릉은 객사한 비운의 소년왕의 능이지만 결코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영월 곳곳에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을 따르던 충신들의 유적이 함께 남아있기 때문이다.

단종의 첫 번째 유배지 청령포 안 단종이 지내던 집의 처마 밑에 단종이 지은 시가 걸려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구나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다노라

시를 읽어보면 단종은 더 이상 힘없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생각된다. 단종이 계속 17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세월이 흘러 20세가 넘고 원한을 품은 채 힘을 기르면 세조에 충분한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세조는 나이 어린 조카를 죽인 것이 아니다. 미래의 강한 정적을 죽인 것이 아닌가요. 청령포에서 마주보이는 언덕엔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의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 데 없서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마음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국어교과서에서 읽던 감회 이상의 생각에 잠기게 한다.
단종의 자규시(子規時) 한수를 써본다.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산을 헤메누나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새벽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빛을 잃어가면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연려실기술>, ‘장릉지’에 수록된 단종의 시

아 그 무엇이 열일곱 소년으로 하여금 그토록 절절한 시를 남기게 한 것일까.

장릉(莊陵) 관람정보 팜프렡,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의 내용을 요약해 본다. 옛 기록을 따라 500여년 전 영월로 돌아가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내용이다.

늘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궁정을 거닐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 세종과의 추억도 떠오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비명에 간 아버지 문종의 인지한 얼굴도 떠오른다. 자신을 낳은지 하루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육신의 눈물도 생각난다. 무엇보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의 그리운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그러나 단종은 살아서 영월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미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숙부 세조의 서슬 퍼런 기운은 어린 그가 넘보기에는 너무나 높고 강한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이 숙부에게 옥쇄를 내어줄 적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는 박팽년의 마음, 그리고 세조의 달콤한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단종을 향한 충정을 보여줬던 성삼문의 마음, 두 사람의 흐트러짐 없는 절개를 표현한 시는 지금도 후세에 전하여 진다.

 까마귀 눈 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 ‘까마귀 눈비맞아’에서

이에 대해 성삼문의 충의가는,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서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사육신들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한 조각 붉은 마음 바로 단종을 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충신들이 모두 자신의 복위를 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만고 충신의 이야기는 계속 회자된다. 일국의 왕으로 신하들을 보듬지 못한 단종의 비통함은 사육신의 충정만큼이나 컸을 터...

아!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피를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말로 단종이 마지막으로 품었던 단 한가지 마음이 아니었을넌지. 약관의 어린 임금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험한 바람에 꺾여버린 꽃망울처럼 단종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이었다.

영월(寧越)은 지명처럼 ‘편안히 넘어가는’ 고장이 아니었다. 옴팡 들어간 분지형태의 이 땅에 닿으려면 첩첩이 가로막는 산들을 뚫어야 했다. 복작거리는 거대도시 서울에서 오로지 가는 길은 오르막이 길었고, 그 끝에선 유배?은둔?피란의 역사가 봄볕을 쬐며 슬픔을 말리고 있었다.(조선일보 주말 Magagine에서)

서울에서 영월로 가는 내내 ‘참 멀다’라는 생각을 했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지금도 이렇게 먼데, 유배지를 향한 단종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걸어가며 얼마나 심란했을까. 이런 생각에 영월가는 심정이 덩달아 가볍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장릉은 의외로 활기가 넘쳐있었다. 참배객들의 발검음도 끊이지 않았고, 단종의 편이 되어 주었던 역사적 인물의 기념구조물들도 함께 있어 단종의 장릉은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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