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건 낮건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등산이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기 위한 피나는 싸움의 연속이라고도 말하는가 보다. 폴란드 산악인 예지 쿠크츠카는 『등산은 인내의 예술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8000m 고봉을 완전 등반한 위대한 산악인이다. 등산을 인생살이에 비교할 수 있는 구봉대산(九峰臺山)은 불가(佛家)에서 최고의 성물(聖物)로 떠받드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간직하고 있는 법흥사(法興寺)가 위치한 사자산의 남산(南山)으로 인간이 태어난 유년, 청년, 장년기를 거쳐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아홉봉우리에 새겨 표현하고 있다.

법흥사 주차장이 산행들머리다. 똬리처럼 틀어 앉은 산세를 돌아 내려오면 제자리에 다시 돌아오니 인생의 윤회를 닮았고, 희망과 낙망, 고난과 행복의 엇갈림이 인생인 것처럼 원점회기형 등산을 마치면서 양달골과 응달골이 계곡수가 함수하여 주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인생살이의 명암을 관조하게 되는 산이다. 산악인들은 이상적인 산행조건으로, 출발지에서 버스로 2~3시간 떨어져 있고, 산행시간은 4시간 전후에 아기자기한 암릉코스를 갖춘 산이라고 한다.

구봉대산은 이런 조건을 모두 지니고 있는 산이다. 지난 해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아기자기한 눈덮힌 암릉코스에 칼날 위를 걸어가듯 조심조심 걷노라면 경사진 바위 슬랩이 앞을 막고, 수직에 가까운 수십길 절벽이 하늘과 땅을 갈라놓은 듯 새파랗게 날이 서 있고 사이사이 굵은 보조자일이 등산객들의 안전을 도와주려고 매달려 있으니 험준하여 만만하게 오르내리기 쉽지 않았다.

어느 등산객의 산행기에서처럼, 가족산행에 결코 적합한(?)코스가 아닐성 싶었다. 그래서 인생역정을 아홉 봉우리에 담아 구봉대산이라 했는가 싶었다.

『인간 유전자 완전해석 난치병 치료 앞당겼다』 며칠 전 신문에 대서 특필되었던 생명공학의 쾌거 소식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유전정보 설계도 만든 것』이라는 이 발표는 인간의 달 착륙 소식이래 그 보다 더 위대한 소식이라고 떠들썩하다.

질병의 진단, 예방과 치료에 획기적인 변화를 부를 것이라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 종교의 세계 그리고 속세 번뇌를 과학으로 풀어 헤칠 수 있을까?

인생의 4가지 고통을 생고(生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그리고 사고(死苦)라고 한다. 이 지구상의 모든 중생은, 육체 감각, 상상(想像), 마음의 작용, 그리고 의식 등 심신의 작용을 지니고 있다.

산행시에는 모든 세상번뇌를 잊고,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는 여러 등산객들을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불경기 사태 이후 직장을 잃은 가장들, 마음속 원망과 증오심을 달래려는 사람들 등등...

그러나 눈, 비 그리고 배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집중해야만 시퍼런날 등을 통과하고, 인내하지 않으면 정상에 설 수 없는 등반은 잡념을 씻어 주기에 충분하다.

구봉대산 초입, 오솔길 따라 자작자무 군락지 그리고 납엽송 숲을 뒤로하면 1봉 양이봉을 반갑게 만난다. 양이봉은 ‘부모님의 금슬로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봉대산 봉우리 중에서 등반하기에 가장 힘든 곳이라고 하는데 겨울철 눈이 많이 쌓였을 때는 궁둥이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니 해동(解冬)될 때는 질퍽거려 오르기 힘든 것처럼 인간의 잉태와 산고(産苦)의 어려움을 뜻하는 교훈적인 봉우리 산행이다. 2봉 아이봉은 새 생명이 탄생함을 뜻하며, 3봉 장생봉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뜻한다.

옛 어른들은 20대에 출세하며 30대에 재물이라 하였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결혼관, 출세관도 변화를 거듭하고, 전자정보화시대 10대의 성공신화가 화두가 되는 세상에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리를 짓누른다.

4봉 관대봉은 벼슬길에 오름을 뜻하고, 5봉 대왕봉은 인생사에서 절정기를 맞는 시기를 뜻한다.

지금까지 지나쳤던 5봉까지의 능선길은 표고차가 거의 없어 마치 가벼운 산책로를 걷는 착각 마저 들게 하였지만 5봉은 10여 미터 높이의 바위가 앞을 막고 서서 가장 험하다.

그래서 인생사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기업이나 병원 경영상에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더 조심하라는 뜻으로 받아드려지는 엄숙한 봉우리다.

6봉 관망봉은 ‘지친 몸을 쉬어간다’는 봉우리다. 구봉대산에서 조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그라나 방심은 금물이다. 그것은 인생사에서 머뭇거림과 다름이 없겠다 생각된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면 1백여 미터 깎아지른 절벽이 위용을 자랑하는 때문이다. 전망대에서는 땀을 식히며 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듣게 되었다.

1996년 10월, 그러니까 내가 환갑을 맞던 가을로 기억하고 있는데 영월사자산 법흥사 삼보(三寶) 주지 스님께서는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시면서 값진 글을 써 주시어 마음의 위안을 크게 받은 기억을 더듬게 하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욕심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모든 물질의 근원은 물이라 했던가? 구봉대산이 주천에 있어 샘물이 솟아오르는 곳이요, 그래서 동네 이름도 주천면과 수주면이라 이름 지어졌다니, 평창강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전망대에서 멀리 조망하면 구봉대산이 백덕산과 사자산 능선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지리산 반야봉(般若峰)을 빼어 닮은 백덕산, 사자산 그리고 연화봉 정상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더듬어 내려가 본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법(法)의 진실상(眞實相)을 아는 지혜, 실상(實相)과 진여(眞如)를 달관(達觀)하는 지혜, 여실지(如實智)를 반야(般若)라 한다. 한편으로는 무서운 얼굴을 한 귀녀(鬼女)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니, 전망대에서 쉬어가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하나, 반야봉을 닮은 백덕 사자산을 바라보면서 달관하여 세상 번뇌를 잊어버리고 마음을 맑게 하라는 곳으로 생각하였다.

5봉부터 6봉 사이는 다른 봉우리들 간격보다 짧으니 벼슬길에 올라 인생의 절정기는 짧다는 사실을 터득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전성기는 짧은 것, 욕심 버리고, 세상사에 순응하며 관조하라는 뜻의 5봉에서는 이순(耳順)의 참뜻을 알라는 뜻으로 받아드려야겠다.

인생을 순간이요 찰라라 했던가? 돌고 도는 것이 인생사(人生事)라 했다. 태어나 성장하여 출세하고, 일에 파묻혀 사는 인간은 늙고 병이 들게 마련이다. 7봉은 쇠봉이다. 교수 정년에 임한 어느 교수의 말씀처럼 ‘노병(老兵)은 건재하다’ 건강하게 살아야 된다.

지난해 연말 망년회석상에서 고등학교 동기회장은 일건(一健), 이처(二妻), 삼재(三財), 사사(四事), 오우(五友)를 설파했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다. 나는 이 다섯가지 조건에 한가지 유의사항을 더하고 있다. 친구들이 놀러 나오라고 권유할 때는 세 번 이상 부르는 일 없을 것이니 두 번까지 부를 때 부지런히 친구 찾아 나서라는 말이다.

인생은 덧없다. 8봉은 북망봉, 북망산천으로 간다는 뜻의 봉우리가 당당히 버티고 서있다. 여덟 개 봉우리를 거치며 인간은 과연 윤회하는가?

9봉 윤희봉을 거치면 능선은 끝이 난다. 우리 일행들은 적멸보궁을 뜻있게 볼 수 있도록 산행코스를 9봉부터 역주하였다. 그래서 길고 가파른 하산길이 오르막길이 되어서 힘이 다 빠져 9봉에 도착하며, 인간이 죽어 윤회가 더더욱 어렵지 않겠는가?를 모두 입 모아 한마디씩 하면서 8봉으로 향하였다.

불교에서는 퍽 조용하고 괴괴한 상태를 적정(寂靜)이라 부르고 또한 번뇌를 떠나 고(苦)를 멸(滅)한 해탈(解脫) 열반(涅槃)의 경지를 적정이라 부른다.

땀 흘려 걸어 내려온 길, 마음은 어느 산행보다 평정하였다. 법흥사 적멸보궁을 뒤로하고 하산하면서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고 죽어 다시, 태어나는 윤회사상을 담고 있는 구봉대산 산행은 무릉도원의 선계(仙界)를 돌아 내려온 듯 가벼운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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