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는 누구나 먹는 국민간식이다. 조선시대땐 왕가(王家) 음식이였다. 떡볶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한글기록은 1860년 이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요리서 ‘주식시의(酒食是儀)’에 등장하는 ‘ㅅ덕복기’다.

이 책 속에 떡볶이는 ‘흰떡을 잘하여 닷 푼 길이(3.5㎝정도)씩 잘라 네 쪽씩 내어 솥이나 통노구에 달구다가 기름을 많이 두르고 쇠고기를 가늘게 두드려 떡 썬 것과 같이 볶아’ 다양한 재료와 양념을 넣고 먹은 음식이었다.

떡볶이 역사는 꽤 길어서 옛날엔 ‘병자(餠炙)’라고도 했다. 옛날엔 고추장이 아닌 간장이 앙념이었다. 떡볶이는 조선 세조 임금 때 어의전순의가 편찬한 식료찬요(食燎纂要·1460)에 처음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엔 왕가와 양반가의 음식으로 소개되어있다.
 
 1938년 대중가요 ‘오빠는 풍각쟁이’의 가사에는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오이나 콩나물만 나한테 주구’라는 구절처럼 일반서민은 쉽게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고추장 떡볶이 탄생역사는 불분명하다.

1950년대 서울 신당동 떡볶이집의 원조 고(故)마복림 할머니가 중국 식당에서 가래떡을 실수록 짜장면 그릇에 빠뜨린 것에서 착안해낸 것이 고추장에 버무린 가래떡이 원조라 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닌듯하다. 떡볶이는 6.25전쟁 이후 미국산 밀가루가 구호물자로 들어오면서, 1960년대 말부터는 분식장려운동 유행화와 대중화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969년 보사부는 분식이용 조리법 연구발표회를 열었다. 이 발표회에 떡볶이가 처음 등장했다. 학교주변에는 ‘맵고 뜨거운 떡볶이’가 불량식품으로 등장한 것도 그때였다. 1970년대에는 고추장으로 벌겋게 볶은 떡볶이가 등장했다. 쌀떡이 밀가루떡으로 양념은 간장에서 고추장으로 바뀌면서 떡볶이는 가장 흔한 대중간식으로 자리잡아갔다.

떡볶이는 길거리음식(streetfood)이다. 노점 좌판에서 냄비나 번철하나 달랑 걸어놓고 팔 수 있는 음식이다. 언제부터 떡볶이가 길거리에서 팔렸는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없다. 아마도 역사란 늘 ‘있는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조선시대 종로시전 앞에도 좌판이 놓였는데, 그 좌판에 떡볶이가 있었을까? 그 시절 우리의 쌀 수급 사정상 고급음식 축에 드는 떡볶이가 좌판에서 팔렸을까? 일제강점기에도 한반도 쌀 사정은 항시 부족하여 술, 엿, 떡 등을 만들지 못하게 단속 하였으니, 좌판에서 떡볶이 보기란 어려웠을 것이고, 광복이후에도 쌀 사정은 좋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떡볶이가 길거리음식으로 크게 번창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반도 농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통일벼재배’다. 1971년 인디카와 자포니카 품종을 교배하여 얻은 통일벼가 개발되어, 기존 벼에 비해 생산량도 30% 많았다. 1976년 통일벼 재배면적이 44%로 확대되어 쌀 자급률 100%를 이루었다.

한민족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주곡자급이 이루어졌다. 그 후 쌀은 남아돌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농민에게서 쌀을 비싸게 사고, 도시민에게는 쌀을 싸게 파는 이중곡가정책을 시행하였다. 쌀이 싸지니 이를 이용한 가공식품산업이 활발해졌다. 그중에 떡이 가장 쉬운 품목이어서 지금은 전국의 전통시장에 있는 떡집골목이 그때 조성된 것이다.

떡볶이 좌판도 부쩍 늘었다. 값싼 정부미를 사다가 떡을 만드니 마진이 높아져서 떡볶이가 번창했다. 연탄 화로에 냄비하나만 있으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신당동 떡볶이가 크게 번창하게 된 시점도 1970년대이다.

떡볶이의 계통도 그 조리법에 따라 단순치는 않다 신당동 냄비 떡볶이는 ‘떡전골’이요, 포장마차 떡볶이는 ‘떡조림’이라니 먹어보는 것이 상책이지만 설명을 더 들어보자.

떡볶이라는 이름은 ‘가래떡을 볶는다.’는 조리법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떡볶이는 볶지 않는다. 떡볶이라는 이름에만 ‘볶이’가 붙어있다. 냄비에 넣고 끓인다. 그래서 ‘조림’이나 ‘탕’에 가깝다. 제대로 이름을 붙인다면 ‘떡조림’이나 ‘떡탕’이다. ‘떡조림’이나 ‘떡탕’이라고 하면 가래떡에 여러 가지 채소, 고기 넣고 끓이는 탕, ‘떡전골’이 있다. ‘떡전골’의 음식을 한 그릇에 담으면 ‘떡국’이다.

6.25전쟁 이후 길거리 음식으로 떡볶이가 등장했다. 전통의 떡볶이가 간소해진 것이었다. 동그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간장양념을 한 가래떡을 볶았다. 시장입구에 이런 좌판이 생겼다. 여기에 어느 순간 고춧가루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매운 떡볶이는 번철 떡볶이에서 생겨 지금도 서울의 전통시장에 일부 그 흔적이 남아있다.

신당동 떡볶이는 전형적 떡전골 또는 떡탕이다. 냄비에 국물이 흥건하게 들어있으며 채소도 듬뿍 들어가는 것이 고추장전골 맛이다. 이 떡볶이를 찌개삼아 밥을 먹기도 하고, 안주삼아 술도 마실 수 있다. 간식이라기보다는 끼니의 음식이다. 번철에 볶는 고전적 떡볶이, 신당동 떡볶이도 그 초창기에는 번철 떡볶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70년대 신당동에서는 좌판에 모여 앉아 떡볶이 안주삼아 술 마시고 미팅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DJ박스가 설치되어 고등학생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신당동 떡볶이 집에는 DJ박스가 아직도 있다. 신청곡도 받고 사연도 전해준다. 아 이젠 중구 신당동 떡볶이골목 번잡하지만 떡볶이 고객에게는 발렛파킹을 해주고 있다. 번화한 거리 수없는 간판 서로 원조라 뽐낸다.

2014년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보다 매스컴을 뜨겁게 달군 먹을거리가 있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존 케리 미국국무장관이 서울 종로구의 통인시장에서 떡볶이를 먹고는 ‘베리 굿(very good)!’을 연발했기 때문이었다.

케리장관이 맛본 떡볶이는 ‘기름 떡볶이’였다. 고추장을 푼 물에 자작하게 끓여내는 일반 떡볶이와 달리 기름에 볶아낸 떡볶이였다. 새끼손가락 굵기의 가는 가래떡을 기름에 튀겨 간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간장으로 양념한 떡볶이는 쫄깃하고 바삭한 맛이 나며, 우리가 흔히 궁중떡볶이로 부르고 있는 떡볶이와 생김새가 닮았다.

궁중떡볶이는 가래떡을 썰어 쇠고기와 채소를 넣고 양념하여 볶은 것이다. 1800년대 요리책<시의전서(是議全書)>에 ‘궁중에서 흰떡과 등심살, 간장, 파 등으로 떡찜을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음식이 궁중떡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쌀가공식품협회가 운영하는 떡볶이연구소에서는 궁중떡볶이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7세기 전국팔로에서 가장 만난 음식은 한양으로 올려 보냈는데 이중 파평 윤씨 종가(坡平尹氏 宗家)에서 떡과 쇠갈비를 간장양념에 볶아 올렸다. 잡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요리로 생나물과 마른나물, 쇠고기를 주요 재료로 삼고 당면대신 쌀떡을 넣어 간장으로 양념한 것이다. 당시 입맛을 잃었던 왕이 이 떡볶이를 맛보고서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 이후 궁중의 ‘정월 요리’로 자리매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떡볶이 맛도 세월 따라 변하고 변해 ‘그때 그 맛’은 이제 ‘별미’가 됐다. 납작하고 굵은 타원형 떡 대신 손가락 굵기의 가는 떡 달콤한 양념대신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주를 이루는 옛날 떡볶이는 찾아간다. 요즘 아이들은 밍밍하게 느낄 수도 있으나 ‘어른을 위한 떡볶이’라 해도 될 듯하다.

‘원조 떡볶이’, “30년 전 맛과 똑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이유는 단골집에서 빻아온 고춧가루와 마늘 그리고 갖은 양념, 정확히 재료 맛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란다. 어릴 적 먹던 맛을 찾아 손자, 손녀 손잡고 찾아오는 단골손님들 100%쌀로 만든 떡은 가늘고 길다. 아주 말랑말랑하다. 양념이 쫄면 짭조름한 어묵국물을 부어서, 적당이 간이 배어 매콤한 떡이 골목의 추억을 자극한다.

50년째 골목떡볶이 장사하시는 할머니들 효자동 통인시장에서는 50년 전부터 다섯 명의 할머니가 ‘하얀 떡볶이’와 ‘빨간 떡볶이’를 팔았단다.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서 한바탕 공을 차고 난 후 달려간 떡볶이 집. 주황색 천막 아래 모여 앉아 먹던 떡볶이 ‘100원 어치’는 신나는 오후의 마침표이며 즐거움의 상징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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