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열병이 어떤 과정을 겪는가" 새 시각 제공
일본서 가장 많이 읽히는 정신병리학 책의 하나


정신분열병의 시작이 어떤 과정을 겪는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독일의 이론서 『정신분열병의 시작』(Die beginnende Schizophrenie)이 국내에 소개됐다.

"망상(妄想)의 게슈탈트 분석의 시도"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겟팅겐 대학 정신신경과학교실 주임교수를 지낸 바 있는 클라우스 콘라드(Klaus Conrad)가 저술한 것으로, 경희의대 신경정신과 송지영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중앙문화사刊/428쪽).

송 교수는 번역본 서문에서 "저자가 100예 이상의 증례를 인용하여 당시의 새로운 심리학설, 물리학, 생물학 등의 다양한 지식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분열병 증상을 게슈탈트 이론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이 책은 정신분열병의 기초적 개념을 이해하고자 하는 정신과 의사들에게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할뿐더러 철학, 물리학 혹은 인접 자연과학의 개념을 두루 아우르는 폭 넓은 학문 태도가 우리 학계의 귀감을 살만하다고 했다.

정신분열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저자인 콘라드(1905-1961)는 야스퍼스와 하이델베르크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신분열병에 관한 유기역동설(有機力動說)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정신분열병을 장기간에 걸친 질환으로 파악하고, 그 긴 경과의 시작[初回 분열병, 1회의 슈프(Schub)]을 트레마(Trema), 아포페니(Apophane), 아포칼립스(Apokalypse), 고정화(固定化) 등의 네 단계(phase)와 잔유(殘遺) 상태로 나눠 분석하고 있다(여기서 슈프는 트레마期에서 고정화期까지의 전 과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편린으로나마 그의 이론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책 내용의 극히 일부를 큰따옴표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트레마期 = "심적인 전체장(場)은 장벽에 둘러싸여지고, 자유는 차츰차츰 좁혀지고, 궁지가 발생하고, 위급 반응을 취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차츰 이해 불능인 의미 없는 언동으로써 정신병 발병에 선행한다... "자신을 타인(의 총체)으로부터 격리하는 심연"으로써... 분열병성 망상이 처음 출현하는 것은 뛰어넘기가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포페니期 = "세계의 중심점으로 몰린 "나"는 이미 뛰어넘기를 전혀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나"를 움직이지만, 마찬가지로 "나"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체험을 한다... 착상(着想)은... 계시(啓示)로 되고, 사고(思考)의 내용은 "말소리로 훤히 들린다"가 되고, 누구에게나 읽혀지는 것이 된다... 내부 세계는 외부 세계에 훤히 들리게 된다... 세계와 "나" 사이의 벽은 아무리 빠져나가려 해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는... 연속체로서의 대상 세계는 그대로 존재한다."

▲아포칼립스期 = "지각 관련의 이완은 더 증가하고... 완전히 통합성을 잃은 상(像, 이미지)이 전체장(場)에 범람한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체험장(體驗場)과 극히 비슷하다... 사고 관련의 질서를 잃게 되고, 언어 해체가 생기고, "나"와는 완전히 관계가 없었던 소리가 내부 세계의 장(場)을 지배한다."

▲고정화期 = "(아포칼립스期의) 프로세스가 종말 단계에 이르면 죽게 되지만... 그곳까지 진행되지 않는다면 서서히 고정화 과정으로 된다... 아포칼립스 단계라고 말하는 최정점에 도달할 때까지도 아포페니 단계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내리막길이라도 아포페니 체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정화는 코페르니쿠스적 회전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돌연 환자에게 있어서 "뛰어넘기"가 다시 가능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잔유 상태 : "만일, 잔유라는 것이 없다면 정신병은 "완전히 나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잔유라는 것은 정신병과 동시에 개시되는 에너지ㆍ포텐셜의 감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새로운 관점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은 독일 원본 출판사로부터 판권을 허락 받았으므로 한국어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번역이 아닌 중역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야마구찌 나오히꼬 등의 일어판을 번역한 것이고 난해한 부분을 독일어 원본을 참고해 수정, 보완했기 때문이다.

송 교수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증상을 이런 관점에서도 보는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다면 번역 작업의 "보상은 충분하다"면서 독일어에 능통한 정신과 의사에 의해 새로운 판이 나올 때까지 그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송 교수는 1999년 당시 니혼 대학 정신과 주임교수였던 요시미 노가미 박사에게 "일본에서 정신병리학 책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많이 읽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추천 받았던 책이 바로 이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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