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열심히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 보고서가 어떤 자기계발서나 인생지침서보다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줄 수 있다. 바로 그런 인생 보고서가 출간됐다. 한국 외과의학의 산 역사, 허경발 박사가 의사로 살아온 70년을 회고하며 집필한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시오”가 그런 책이다.

올해 91세. 고령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할 만큼 유려한 육필로 직접 책을 집필했다.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된 꼼꼼한 자료 수집 및 보관, 젊은이 못지않은 또렷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술술 써 내려간 허경발 박사의 책은 심각한 의학서가 아니라 한 의사의 결코 녹록치 않았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따뜻하고 유쾌한’ 삶의 이야기이다,

허 박사는 머리말에서 집필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내 나이 90이 되었고, 의사로 살아온 세월만도 70여 년이 되어간다. 긴 세월 겪은 이러저러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의사로 살아오는 동안 만약 나에게 오해가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이 기록이 당시의 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더불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왔다는 보고도 하고 싶었다.”

허 박사가 책에서 들려주는 의사로서의 삶의 보고, 삶의 궤적은 그의 정신과 품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글 사이사이 담긴 학(學)과 덕(德)의 깊이는 후배 의사는 물론, 우리 일반인들에게도 잔잔한 감동과 깊은 가르침을 준다.

이 책 속에는 허 박사가 의술을 통해 맺은 인연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 인연 중엔 시인 박목월, 이당 김은호, 평보 서희환 등 문화예술계 인맥은 물론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방우영 전 조선일보 회장 등 유명 인사들이 있다. 하지만 허 박사가 정말 잊을 수 없는 인연들은 평범한 환자들이다. “사람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해라.”라며 호통 치던 환자 덕분에 그는 간 내 담석이 소장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하는 측도(側道)형성술을 개발, 이후 많은 담석 환자들의 고통을 치유해주었다. 이런저런 환자들과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은 허 박사의 따뜻한 인술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허 박사는 순천향대학병원 개원부터 합류, 의료원장과 대학원장을 거쳐 그곳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정년퇴직 후 70이 넘은 나이에 의사 인생 2막을 보훈병원 원장으로 보냈다. 보훈병원 재직 시를 회고한 글에서는 그가 얼마나 많은 개선과 개혁을 통해 명(名) 병원장의 모범적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에서는 담석수술의 최고권위자답게 <담석증에 대한 이해와 오해> 그리고 <병에도 멜로디가 있다> 등 우리에게 필요한 의학 지식도 일부 알려주고 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세웠지만 목표로 했던 일을 성취한 뒤에는 그 공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지 아니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스승님의 말씀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는 허 박사의 면모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추천사에서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허 박사는 한평생 의사로 봉직하면서 주어진 환경과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과 성의를 다하는 모습으로, 보기 드물게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인물이다. ……청하는 병고에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늘 깊은 연민을 가지고 함께 병마와 싸워온 훌륭한 의사다. … 1988년 보사부 장관직을 추천했을 때 자신의 천직을 다하겠다며 그 자리를 사양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허 박사는 8·15해방과 6·25 등 우리 민족의 최대 격동기를 거치면서 1951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학문의 폭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 1954년 뉴욕대학 벨뷰(Bellevue) 병원과 뉴욕 사이댄햄(Sydenham) 병원에서 외과학 수련을 받았다. 허 교수는 환자 수술에만 주력하는 여느 외과의사와는 달리 실험의학에 남다른 관심과 흥미를 갖고 우수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특히 췌장외분비기능과 담즙분비연구에는 독보적인 업적을 냈으며 그중 사람에서의 췌장외분비반응을 규명한 논문은 <Journal of Applied Physiology>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담낭외 담석의 빈도가 높던 시기 담석 수술 후 재발 또는 잔류 담석으로 인한 재수술의 번거로움을 감소시키기 위해 조영제 희석법을 이용한 효과적인 담도 조영술을 개발, 많은 담석증 환자들을 재수술의 고통에서 구해주었다. 이 논문은 미국외과학회지 <Annals of Surgery>에 게재됨으로써 그의 학문적인 공헌을 인정받게 되었다. 허 박사는 1971년 위암 및 흑색종 환자에 BCG 요법을 시도하여 우리나라에 항암면역요법을 도입하는 개척자적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72년 허 박사의 BCG 면역치료요법은 한국의료계를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논란이 심했지만 결국 실제 효과와 외국 문헌의 입증에 밀려 논란은 이내 사라졌다. 허경발 박사는 순천향대학병원 개원부터 합류하여, 의료원장과 대학원장을 거쳐 그곳에서 정년퇴직했다. 그리고 70이 넘은 나이에 보훈병원 원장으로 의사 인생 2막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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