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는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사적 제125호로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는 조선역대 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사당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있다. 종묘는 1995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392년 조선태조는 즉위 12일 만인 8월 16일(음력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가 끝나는 대로 한양 천도를 기도했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며,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새 종묘를 짓도록 명을 내렸다. 재위 3년째 태조는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1395년 천도를 단행했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했다. 유교의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편인 동쪽에 종묘(宗廟)를 서쪽에 사직(社稷)을 세웠다.

조선의 왕은 살아 있을 때는 궁궐에 살았다. 죽으면 두 군데로 나뉘어 모셔졌다. 유교에서는 우리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의 말로 옮기면 영혼과 몸이다. 조선의 왕이 죽어서는 몸 즉 백(魄)은 능에 묻었다.

서울 근교에는 조선 왕릉이 많다. 오늘날 교통의 요지에 접근성도 좋다. 그리고 혼은 국가 사당인 종묘에 모셔졌다. 종묘는 종로3가에 있고 찾아가기 쉽다. 종묘는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은 궁궐을 지으면 그 왼쪽에는 역대 황제들을 제사 지내는 사당을, 오른쪽에는 땅과 곡식의 신을 제사 지내는 단(직단:稷檀)을 만들었다.

왕의 조상이란 부계원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양을 상징하고, 땅이나 땅에서 나오는 곡식은 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두 요소로 지상에 생존하는 것이다. 유교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아버지에게서 생명의 정기를 받고 땅에서 나는 곡물로 살아간다. 그래서 종묘는 하늘로 치달아 올라가는 원리를 상징하고, 사직단은 땅으로 들어가는 원리를 상징한다.

조선은 중국의 법제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세계적 문화유산 앞에 질서 없이 늘어선 시설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정문주위 문제는 재고해야 될 사항들이 많다.

정전의 동문은 세 개의 작은 문으로 되어있다. 정전이 산 사람을 위해 지은 건물이라면 왕의 길은 당연히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나 이곳은 선왕(先王)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여서, 가운데 문은 혼령에게 양보하고 왕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를 지나보아도 정전은 정면에서 보려면 다시 왼쪽으로 가야한다.

정전의 계단을 올라가면 정전의 뒷벽이다. 그 뒷벽은 벽돌이다. 비싼 벽돌은 19세기에 가서나 대량 생산했다. 종묘의 정전은 덕이 높은 건물이라 비싼 재료를 썼다. 그 벽돌담이 110m나 이어져있다. 건물이 깊다. 사당의 권위를 세우고자 깊게 만들었다. 정전의 오른쪽 영녕전(永寧殿)과 비교된다. 옆면 계단에 올라 회랑을 바라보면 장엄한 건물임을 직감케 된다.

기둥의 반복적 배열이, 긴 건물임을 직감하게 된다. 뒷담과 옆면은 종묘를 다른 시각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정전 앞으로 가면 정전을 본격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 정전은 처음부터 이렇게 길지 않았다. 조선 초에는 죽은 왕이 별로 없었을 터이니, 그렇게 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자신의 4대조 할아버지 네 분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은 제후국이라 한 건물에 5명의 선왕밖에는 모시지 못했다. (중국은 7명까지 모실 수 있다)

사정이 그러하여 금방 정전이 가득 차니 다른 사당, 곧 별묘(別廟)를 만들어 앞의 왕들을 옮겨 모셨다. 그런데 금방 가득 찼다. 무한정 별묘를 만들 수 없어 조선 조성은 이를 해결하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한 건물을 칸으로 나누어 계속해 신위를 모시는 방법이었다. 굉장히 크기는 하나 결국은 한 채인 셈이다.

종묘의 정전은 아마도 동북아시아의 목조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일지 모른다. 이 건물은 서쪽(오른쪽)부터 시작하여 계속 동쪽으로 증축했는데 지금까지 3번의 증축이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기단 부분을 보면 계단을 옮긴 흔적이 보인다.

정전은 현재 19개의 실로 되어있다. 왕은 한 명 이상의 부인을 둘 수 있었기 때문에 각 실에는 한 명의 왕과 그 부인들이 모셔져있다. 정전에는 모두 합해서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가 모셔져있다.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생전에 공이 많은 왕을 모시고 영녕전에는 재위기간도 짧고 한 일이 별로 없는 왕을 모셨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재위기간 3년, 업적이 별로 없으니 영녕전에 모셔졌다.

정전은 산자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를 모신 사당이다. 역대왕을 모셨기에 근엄하고, 장중한 건물이다. 건물은 사람을 압도한다. 기념비적 규모(monumental scale)로 지은 장중한 건물이다. 사람을 압도한다.
기념비적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단순한 것을 반복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반복이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건물을 볼 때 한 눈으로 파악할 수 없으면 그 건물에 압도당한다. 흔히 우리는 5층 이상 단번에 그 층수를 파악하지 못한다. 5층 이상일 때는 세어보아야 그 층수를 알 수 있다. 5층 이하는 휴먼 스케일이라 부른다.

영녕전은 가운데 4칸이 솟아있다. 그 건물은 사람을 압도하지 못한다.

경전의 양 옆에는 월랑이라고 하는 앞으로 튀어나온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음양론에 충실하게 짓느라 한 건물은 개방적으로 짓고 다른 하나는 창호를 막아놓았다. 하나는 막혀 있고, 하나는 뚫려있다. 정전을 바라보고 오른쪽 것이 개방적인 것인데, 여기에는 천막을 쳐 왕이 그 안에서 해나 비를 피하면서 쉴 수 있게 했다.

정전은 왕실건물이지만 오색단청은 하지 않아 더 정중하게 보인다. 정전 앞에는 사람들이 서있는 하월대, 왕들의 신위가 있는 곳은 한 단계 높은 월대 위다.

정전 영역 안에, 대문 옆에는 공신당(功臣堂)이다. 조선조 때 도와 큰일을 한 신하를 모신 곳이다.

정전 뒤편에는 제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 때 쓴 향과 축문을 태워버리는 망료위(望燎位)가 있다. 서쪽 문을 통해 정전을 나서면 악공청이 있다. 이 곳은 종묘 제례를 할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대기하던 장소다.

종묘제례(宗廟祭禮)

종묘는 건물만큼이나 제례도 중요하다.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제례는 제례악(祭禮樂)과 더불어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북아시아의 왕실 제사 가운데 종묘제례처럼 오래두고 지속적으로 행해진 것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제례는 현재 1년에 한번밖에 하지 않아 볼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다.

제례절차는 생략하고, 제례의 정신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았다.

조선시대 종묘 제례는 가장 큰 제사였다. 당시 제사는 단순히 조상을 추모하는데 끝이지 않고 통치자에게 초월적 권위를 가져다주는 것이어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였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가정에선 가장, 나라에선 통치자였으니, 제사를 폄훼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체제부정행위자였다. 마땅히 극형감이였다. 조선말기 제사를 부정한 천주교 신자들이 극형을 당했다.

조선시대에는 각 실에 배향되어 있는 모든 왕들과 공신자들까지 따로 따로 제사지내지 못하고 한꺼번에 지내면 제기가 5천개가 넘었다하니 그 많은 음식을 모두 올려놓아야 했으므로 이런 제사를 계절마다 한 번씩 드렸으니 적지 않은 재정이 소비됐을 것이다.

제사절차는 일반 사가에서 지내는 의례와 같아서 복잡하지는 않았다. 먼저 신을 맞이하고, 제물을 올리며, 그 다음에 술을 작은 잔에 담아 세 번 올린다. 고려 때까지는 불교가 국교여서 술을 쓰지 않았다. 차를 올렸다. 조선으로 오면서 절에서 제사 지낼 때는 술을 쓰지 않았다.

술을 세 번 올리고 난 뒤, 조상신을 보내드리고 마지막으로 조상께 고했던 축문을 적은 종이 등을 태워버리며 순서가 끝났다. 다음에 음복순서였다. 조상이 마셨다 믿어지는 술을 자신도 마심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조상과 하나 되려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을 듯싶다. 이런 순서는 일반 제사와 비슷한데 종묘 제례만의 독특한 점이 있다면 음악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종묘 제례를 보면 제사 지내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악사와 무용수를 볼 수 있다.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춤이 제례와 함께 UNESCO에 등재되었다. 이 의례는 500여년이란 역사를 가진 것이고, 동북아시아의 왕실 제례로는 유일하게 수 백 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선 조선처럼 오래 지속한 왕조가 없었으니, 수 백 년 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가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제례악은 유교의 예약사상에 의거해 생겨났다. ‘예’는 질서와 예의, 제례 등을 의미한다. ‘약’은 음악이다. ‘예’는 생활에 여유를 상징한다. 음악은 우리의 감성을 순화시킨다. ‘예’로 딱딱해진 선정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공자는 예약을 두루 갖춘 사람이, 이상적 인격 소지자로 높이 평가했다.
종묘 제례에는 음악이외 항상 춤이 함께 등장한다. 한 변에 8명씩 64명이 정사각형을 이루어 추는 팔일무(八佾舞)라는 춤이다.

현재 종묘 제례에 쓰이는 음악은 세종(世宗)이 15세기 초에 작곡한 것이다. 죽어서 중국 음악을 듣는 게 안쓰러우셨던 게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막혀 조선 최고의 강력군자이며 세종의 아들 세조 때에 와서 우리 가무가 가능했다 전한다.

종묘제례는 각 실에서 음악과 춤이 연주되는데 음악은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음악이 연주되면서 조상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가 곁들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종묘 제례는 지낼 때가 되면 왕이 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세자가 전체 제사를 진행하기도 했다는데 제사 절차가 매우 힘들고 복잡하고 번거로우니 그 절차를 진행하는 왕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게다가 추운 겨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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