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시작한 북한산 둘레길 ‘우이령길’구간은 우이령(牛耳嶺)(소귀고개)를 넘고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우이탐방지원센터를 거쳐 우이동 치안센터 앞까지 이어진다. 우이령은 1950년 6.25전쟁 이전에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와 서울 우이동 일대를 잇던 고갯길이었다.

그 당시 주둔해 있던 미36공병단이 물자수송을 위해 1965년 4월 24일 차량통행이 가능하도록 공병도로를 개설했다. 교현리 일대에서 생산된 각종 농산물을 팔러 가기 위해 넘던 꼬부랑길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1.21 사태 후 군부대와 전투경찰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2009년 7월 10일 제반적 탐방예약제를 실시하며 다시 개발되었다.

우이령길은 서울 도심의 DMZ로 불렀다. 2009년 7월 중순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주말 하루 방문객이 1만5000명, 평일엔 3000명 수준이었고, 7월 말까지 방문객 수는 10만 명을 상회하였다. 7월 27일에는 사전예약제로 환원되었다. 우이동과 경기 양주시 교현리에서 하루 390명씩 780명 만을 입장시키기도 했다. 평일 평균 방문객은 200여 명으로 줄었다. 우이동과 교현리에는 공단사무실을 설치하면서 직원도 상주시켰으며, Ecoguide도 두워 생태해설도 시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1994년 서울 강북구와 경기도 양주시는 우이령에 왕복 2차선 도로의 확ㆍ포장 공사를 추진하고 나섰다. 우이령은 40여 년 넘게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여 건강한 생태숲으로 변하였다.

우이령의 자연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도로 확포장이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총 거리 약 6.8km, 가파르지 않고 오르내리는 산길이 아니어서 넉넉잡아도 3시간이면 자유롭게 걸어 넘으면서 자연스러운 생태공원 같은 국수나무, 산벚나무, 진달래 그리고 철쭉 군락을 보며 즐거운 소풍을 할 수 있다.

리기다 소나무, 참나무들은 하늘 향해 뻗어 올라 사계절 변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관목, 교목, 침엽수, 활엽수가 조화를 이룬 생태숲은 힐링숲이 다름이 아니라는 평을 듣고 있다. 도봉산과 북한산 둘레길이 완전 개방되고 있는 시점에 우이령길은 안보문제로 예방탐방제로 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해제를 검토하는 단계로도 보인다.

우이령길은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이면서 수천 년간 지났다. 서울 우이동과 경기 양주시의 가장 단거리에 잇는 오솔길이었다. 조선시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이름없이 길만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에도 사람들이 걸어 넘어 이용하고 있었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우이령(牛耳嶺)이란 이름은 남쪽 북한산, 북쪽 도봉산능선이 고개를 중심으로 ‘소의 귀’처럼 축 늘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귀천계곡도 그 이름을 알 때가 되려면 북한산을 몇 번을 다녀보아야 터득하게 된다.

우이령은 군시설 안보지역이다. 일일탐방객 수는 천명으로 제한하면서 예약이 필수다. ‘우이령길’ 시작점부터 길 옆에는 철조망이 쳐있고 나무가 우거졌다. 시작하는 길에는 철조망이 따라간다.

우이령길이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것은 6.25전쟁 때부터다. 작은 오솔길에 불과하던 좁은 길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군 공병부대의 수송도로로 확대되면서 부터다.

우이령 정상은 해발 330m. 시멘트 영문비석에는 ‘이 도로는 미군 36공병단의 공병도로로 109공병대대와 102공병대대에 의해 1964~1965년에 건설됐다’고 쓰여 있다. 1965년 개통 이후에도 사람들 왕래는 자유로웠다.

1968년 1월 21일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이 우이령길을 통해 침투하여 자하문을 넘어 북악산에서 국군과 교전을 벌이다 일망타진 되었다. 안보상의 조치로 우이령길과 북악산 지역은 전면 통제되었다. 역사의 단절 상태, 오랜 단절 끝에 관계소원은 민간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2009년 7월 중순 40여 년 만에 속살을 드러내자 탐방객이 모여들었다. 호기심에 신비감이 크게 작용하였다.

우이동 공단사무실 바로 아래 우이계곡 주변에는 음식점이 줄 지어 서있지만 그 위로는 군 통제구역으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

북한산 둘레길 소나무숲길은 우이동 치안센터에서 시작된다. 북한산 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우이계곡을 따라 소나무 숲길 입구를 지나 우이동 치안센터 갈림길에 들어서면 우측엔 파인트리 코도, 콘크리트 다리 건너 오른편에는 그린하우스가 있고 왼편 작은 언덕길에는 신일단체연수원, 허브뜨락, 예정원, 대하정을 뒤로 하면 우이탐방 지원센터에 이른다.

공단사무실 바로 위에서 전경부대까지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어지고 사무실 바로 앞에는 30배 가까이 되는 키 큰 소나무 몇 그루는 한때 호기심과 신비의 화제를 일으킨 장소였다. 키 큰 소나무에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새흘리기’가 까치둥지에 알을 낳고 부화하여 새끼를 기른 정말 경사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던 생태복원의 신비를 보여준 장소였다.

마사토 흙길은 걷기 편하다. 우이령길 이정표에는 북-교현리4km, 석굴암삼거리 2km, 소귀고개(우이령) 1km, 그리고 남쪽에서 벌써 0.5km 왔으니, 우이동은 0.5km 떨어져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마사토길 따라 우이령 가는 길엔 야생화단지가 3곳,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맨발걷기도 가능했다. 저탄소 플러스 에너지 대기측정소를 지나며 출발한 지 40분쯤에는 우이령길 정상 소귀고개에 이른다.

10m콘크리트 방어벽, 대전차 장애물이 위용을 자랑하며 과객은 긴장을 하게 된다. 고개를 넘으면 공터가 나오고 군 훈련장이다. 길 양편은 진달래 자연군락지, 소나무 군락지, 북쪽 교현리 방향으로는 신갈나무, 졸참나무가 무성하고, 숲의 천이과정으로 생각되었다. 우이령 정상에 서면 길 양편으로 도봉산과 북한산을 가르는 계곡길이 확 뚫렸고, 도봉산 쪽 조망이 확 뚫려 오봉이 뚜렷하게 보인다.

우이동길 작전도로 개통기념비, 노변 사방사업 기념비를 돌아보며 우이령길 전망대에 나선다. 교현리 쪽으로 이동하며 광장과 차량통제소를 거쳐 이동하면 석굴암 갈림길이다. 이제 반시간쯤이면 교현리 도봉산 송추분소 사무실에 이를 것을 예상하며 가벼운 산책길을 걷게 된다.

도봉산 오봉전선 안내판에는 관광객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길이 갈라진다. 왼쪽 다리를 건너는 길은 오봉산 석굴암으로 이어진다. 포장길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석굴암에 이른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우이령 안보체험관은 원통형 모양이다.

오봉능선은 도봉 주능선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삐죽이 뻗어있다. 오봉을 보면 가까운 여성봉(女性峰)을 꼭 보게 된다. 여성봉(495m)은 무명봉이었다. 여성봉은 송추남능선 상에 있지만 오봉에서 20분쯤 걸어가면 만난다.

“옛적 도봉산 아래 힘이 장사인 다섯 형제가 살았는데, 새로 부임한 원님의 외동딸에게 형제들이 모두 홀딱 빠져버렸다. 원님은 형제 중에 가장 큰 바위를 올려놓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네 형제는 거대한 바위를 올려 놓았지만 좀 힘이 떨어지는 넷째는 제대로 올려놓지 못했다. 오봉 중에 꼭대기부터 네 번째 바위만 ‘감투바위’라고 부르는 바윗덩어리가 없다. 그러나 원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혼사를 기다리다 지친 딸은 죽고 말았다. 옥황상제는 딸을 가엽게 여겨 여성봉으로 환생시켜 주었지만 짓궂게도 ‘쩍’하고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다섯 형제도 각각 오봉으로 환생해 여성봉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는...”

여성봉 큰 바위 덩어리,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조물주의 조화일세’라는 탄사가 나옴직하다. 오봉은 도봉산의 명품바위다. 다섯 개의 암봉이 각각 머리 위에 거대한 바위 하나씩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생각에 잠겨 있는 다섯 명의 군상(群像)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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